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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풀꽃 Oct 19. 2024

조선시대 청소년으로 산다면? <오백 년째 열다섯>

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8 <조선 판타스틱 잉글리시> 함께

     

김혜정의 <오백 년째 열다섯>은 판타지 소설이다. 경쾌 발랄한 문체로 쓰여 코믹 드라마를 보듯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세 쌍둥이 여학생들이 전학을 왔지만 알고 보면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변신을 할 수 있는 야호(여우)족. 특히 주인공 가을이는 오백 년째 열다섯 살을 거듭 살고 있는 아이다. 여기에 야호족과 호랑족의 수백 년 걸친 부족 간 갈등과 전쟁 이야기가 얽힌다. 자칫하면 웹소설에 등장할 ‘스토리만 있는’ ‘재미만 있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오래오래 젊게(어리게) 산다는 게 과연 좋은 일인가?'라는 주제가 얹힌다. 사춘기 청소년의 고됨도 등장하고 야호족이지만 인간적인 감정에 눈뜨는 장면도 신선하다. 두 종족 사이의 갈등, 그 중간에서 인간적인(?) 고민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도 어여쁘다. 특히 사춘기에 느낄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사랑에 대한 고민이 더해져 만고의 진리 '사랑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명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청소년 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은 소녀들이다. 여자 청소년들이 책을 더 많이 읽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도 모르겠다. 남자 중학생만 가르치는 입장에서, 남학생이 주인공이거나 남학생 입장에서 썼거나 남학생들이 즐겨 읽을 만한 소설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게 안타깝다. 다른 모든 문화적 영역과 마찬가지로 독서와 도서의 시장에도 젊은 여성들이 약진하고 있다.      


그들의 세계에는 '중간계'가 있다

그래도 <오백 년>에는 가을이 주변에 멋진 남자 청소년들이 많이 등장해서 다행이다. 특히 달달하고 고민스러운 현실 장면을 떠나 전설적인 장면 – 야호족과 호랑 족 간의 전쟁- 이 나오면 남학생들도 책을 읽으며 게임 세계에 접근한 듯한 즐거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우리 아이들의 정신세계에는 인간계/동물계라는 현실계 외에 신, 정령, 요괴, 외계인, 좀비, 혹은 뱀파이어 류의 독특한 삶을 이어나가는 천상계/중간계/지하계의 또 다른 존재들이 산다. 그런 또 다른 의미의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어른들은 청소년들과 친해지기 어렵다.      

  

<조선 판타스틱 잉글리시>

'조선 + 잉글리시', 이런 발상 재미있지 않은가? 개인적으로 코믹한 퓨전 사극을 좋아해서 나만 이 발상이 재미있는 걸까? 21세기 대한민국 청소년,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받는 고등학생이 조선시대(사실은 일제 강점기)로 타임 슬립한다. 물리학자들이 아무리 누누이, 시간은 절대 과거로 되돌릴 수 없다고 강조해도 우리에겐 과거로 가서 현실을 바꾸는 것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로라(본명 오로라)는 어느 날 영화촬영장에 갔다가 과거의 전차 속에서 깜빡 든 잠에 그만 일제강점기로 간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가 품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현실은 더 비참했을 터이다. 식민지 시대의 일상은 지금의 것보다도 더 소소하고 구질구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후손들에게는 독립투사들의 비장함,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에 대한 강렬한 증오, 어쨌든 세상이 엄청나게 변화하는 시기로서의 열기/활기와 그것을 가로막는 시대적 고뇌, 어떤 이에게는 문화적 변화의 시대로서의 벨 에포크적 환상, 따위가 있지 않을까. 이 소설은 그런 후손들의 오해(어차피 우린 그 시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으니까)를 잘 버무린다. 그리고 음습한 부분은 등장인물들의 발랄함으로 적당히 퉁치는 지혜까지 발휘한다. 주인공 오로라는 그런 시대로 타입 슬립하여 ‘배꽃학당 3학년’이 된다.     


영어라는 애물단지를 독립에 활용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영어’라는 애물단지를 다룬다는 점에서 작가가 참 영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강대국의 외국어는 어느 시대나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관건이었다. 영어는 일제 때에도 그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무거운 일인가에 대한 고민을 아주 살짝만 언급한다. 묵직하게 다가가든 가볍게 다가가든 영어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에게 ‘현실’이니까.

      

21세기엔 영어가 좀 부족했던 오로라도 20세기 초반 조선(대한제국?)에선 영어 ‘인싸(영천녀, 영어천재소녀라 한다)’다. 그렇게 펼쳐나가는 영어 이야기는 어설픈 일본식/조선식 영어발음과 함께 웃음을 준다. “조선의 독립, 그건 엄연한 사실이야. 잇쯔 투루 댓 조선 비케임 인디펜던트 온 핍프틴 어거스트 나인틴포티파이브.” 이렇게 천기누설도 좀 하면서.     


외국어는 한 개인의 처세의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영어와 같은 세계 중심 언어가 그야말로 '현실'이라면 그것을 통해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오로라는 영어로 조선의 처지를 알리는 글을 써서 독립에 기여한다.  이런 설정은 틀에 박힌 듯 보일 수도 있지만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실이나 당시의 시대상, 문투 따위는 제법 재미있다. 이때는 이렇게 글을 썼다고요? 당시에 독립운동은 그러했다고요? 소설은 소설일 뿐이지만 그게 정말 맞긴 한 건지 고증해 보고 싶어서 다른 역사책을 찾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슬픈 역사였지만 명랑 발랄하게 

짜 맞춘 듯한 플롯과 빠른 전개는 중1, 혹은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 학생들을 위해 맞춤하다. 술술 읽힌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안에 들어있는 작은 장치들의 디테일함이나 역사적 사건, 당시의 언어 따위들이 알알이 적재적소에 막혀 있어 그걸 보는 재미가 또 있다. 책이 출간된 지 얼마 안 됐기에 지금은 나만 읽어 보았지만 내년 수업 시간에 읽히며 학생들의 반응을 볼 생각이다. 얘들아, 재밌겠지? 하긴 풀꽃샘 촉으로 재미있었던 책이 너희들에게 재미없었던 걸 본 적이 없다. 나의 직관을 믿고 다 같이 즐겁게 읽어보자고 ~! 차례만 봐도 재밌을 것 같지 않니?          


내 인생의 드라마틱한 날

경성챗봇 알림톡 도착

영포자에서 영천녀로, 레벨 급상승!

빼앗긴 들의 해무리뚜

액츄얼리, 아임 어 걸 프럼 더 퓨쳐

나는야 일제 강점기 스타일?

모던 시크 걸 납시오!

모여 모여! 경성잉글리시클럽

너 따위한테 꿀리지 않아

양파 까기 미션인가? 까도 까도 또 나오네

숍 걸의 트라우마

소리 질러, 더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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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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