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이른 나이에 부모가 된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 있었다. 너무 이른 연애와 출산에 떠밀려 결혼을 하고 곧 이혼을 한 부모 탓에 그 아이는 포근한 가정의 품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자라야 했다. 그리고 혼자 아들을 키운 아버지가 아들한테 잃어버린 청춘의 그늘을 드리우는 바람에 그 아이는 어둡게 자랐다. 자기를 버리고 간 어머니, 어린아이처럼 아들에게 우울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아버지가 못 견디게 싫은 아이라면 “저는 도대체 누구인가요?”라고 묻고 싶어지지 않을까?
유전보다 강한 힘
마트는 클론이다. 화학과 곤충학을 전공했다는 지은이 낸시 파머가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쓴 이 소설에서 우리가 흔히 품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이라는 ‘자기 정체성 제 1조 1항’에 대한 속박은 산산이 부서진다. 마트는 클론이니까 당연히 생물학적 부모도 없이, 심지어 암소의 자궁을 빌어 태어났지만 자신의 보모 셀리아를 엄마 삼아, 자신의 경호원 탬 린을 아버지 삼아 좋은 가치관과 바른 인생관을 습득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게 교육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마약왕 엘 파트론의 클론이니 유전자는 악인에게 물려받았지만(아니, 유전자를 물려받은 게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고 해야 맞을 테지만) 마트 자신은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선량한 사람으로 자라난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도 어떻게 훌륭하게 자랄 수 있는가, 부족한 부모가 있어도 좋은 사회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부모의 영향보다 더 큰, 스스로의 자존,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 소설은 잘 알려준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존엄은 없다
그러니까 주인공 마트는 모든 것을 상실하고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다. 진정한 존엄은 부모로부터 오는 게 아니다. 스스로 지키지 않는 존엄은 없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중에 부모 탓을 하는 아이들이 있다. 부모를 닮아서, 부모가 나를 잘못 키워서, 부모님 때문에..... 그런 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이보다 더 비참한 탄생과 성장이 있을까? 마트보다 더 깊은 성찰과 고민에서 스스로를 이끌어내는 너 자신과 너를 지지하는 곁의 사람들이 있는데도 너는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끌어내리려 하는가?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 할 사람은 나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50년 넘어 살아도 부모 탓을 하는 ‘어린 어른’ 말이다.
소설은 아직은 그저 가정일 뿐인 ‘클론(복제인간)’이 현실화된다는 SF소설다운 설정에서 출발하지만 클론이 당하는 차별과 비인간적인 대우를 ‘인종 차별’로 바꿔 읽어도 상관없다. 소설은 생명 가진 모든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존중’을 다루고 있다. 과연 누가 우월하고 열등한가 묻는다. 우리 아이들이 모든 존재의 존엄에 대해 생각하는 좋은 질문을 던져줄 소설이다.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우리는 흔히 좋은 부모 아래 좋은 아이가 태어나고 길러진다고 믿지만 그 명제가 사실이라면 나쁜 부모나 불운한 가정을 만난 아이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대체로 그러할 것이기 때문에 부모는 자신을 더 좋은 사람이 되려 벼리고 좋은 환경에서 아이가 자랄 수 있게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사실은 매우 많다는 걸 우린 잘 안다.
나는 좋은 사람으로 자라나고 살아가고 싶지만 내 부모가 그에 못 미치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아이들은 품어보지 않을까? 내가 만약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지금의 당신들 같은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얼마나 많을까? 사실은 부모도 아이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이 갖기'를 선택할 수는 있는 반면 아이들은 태어남 자체에 대한 선택이 불가했기에 더 억울하기도 하다. 그런 발상에서 나온 소설이 이 <페인트>다. 처음 이 제목의 의미가 의아했던 나는 우리 어렸을 때 많이 쓰던 조어 '뺑끼칠(거짓말)'인가 싶었다. 페인트는 – parent’s interview 부모면접을 시설의 아이들이 줄여부르는 말이란다.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은 최상의 시설에서 키워지지만 가정의 입양을 위해 부모 면접을 한다. 입양을 선택하는 가정에는 많은 혜택이 돌아가기에 최종적으로는 아이가 가정을 선택하는 시스템이다. 그 발상 자체가 신선하다. 지금의 '입양'은 불행의 이미지와 떼기 어려운 부분이 있고 양부모가 아이를 선택하며 그나마 입양의 길을 가는 이도 많지 않기에 혼자 살아가야 하는 아이들이 많은 현실에 반해 소설 속 입양 환경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다.
부모 없는 삶은 불가능한가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제뉴(1월에 태어난 아이라 그리 불린단다)는 좀 남다른 아이다. 스스로 입양되지 않기를 선택한다. 꽤 괜찮아 보이는 부모 후보를 알아볼 수 있는 눈조차 있지만 부모 없는 삶을 선택한다. 그런 삶은 왜 없단 말인가? 결혼 없는 삶, 아이 없는 삶이 마치 비정상인 양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 모두는 그저 '제도'일 뿐, 그것도 주겠다는 행복보다는 더 많은 제약을 담보해야 하는 제도일 뿐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이 결혼을 거부하고 출산을 사양하고 다른 삶을 꿈꾸기도 한다면, 부모 없는 삶, 혹은 엄마 아빠로 이루어진 양육자가 아닌 사회적 양육으로도 인간다운 성장이 가능하다는 상상은 왜 불가능한가.
그런 의미에서 제누는 스스로 성숙한 아이, 아니 사람이다.
하긴, 부처도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부모와 환경을 스스로 떠났고 예수도 인간의 부모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않았으되 그들을 한 인간의 영혼으로 연민했다. 어차피 스물 즈음이면, 아니 그 전에 부모가 자신과 완전히 분리된 존재임을 깨닫는 게 인간이고, 그걸 깨달아야만 진정한 인간으로 성장한다면 굳이 부모를 가져야만 하는가.
당신은 완벽한 부모인가 묻는다
물론 이 소설은 그렇게 근본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 같이 보이지는 않는다. 청소년기에 한번쯤 해보는 상상 - 내 부모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부모가 이상적이었을까?- 하는 수준에서 청소년 독자들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글을 쓴 이는 스스로 나는 괜찮은 부모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고, 이 책을 청소년들의 부모가 함께 읽는다면 그런 성찰로 나아가는 좋은 독서를 할 수 있었겠지만 아직은, 거기까지는 아니다. 어쩌면 아이들은, 그래도 그렇게까지 불행하지 않은 아이들이라면 아이를 버린, 혹은 돈에 눈이 멀어 아이들을 입양하러 온 많은 위선적 부모 후보들을 보면서 그래도 나는 사랑받고 태어났고, 부족하나마 나를 사랑해주는 부모와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지독하게 불행한 아이들은 책을 읽는 순간이나마 책속 인물들에 투영된 자신의 부모 모습을 욕하고 저주하며 대리만족을 느낄지도 모른다.
아, 주인공 제누가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그를 외로운 아이라 불쌍해 하진 말자. 그는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시설의 선생님들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는 이런 가짜 부모도 필요하다. 부모가 이러저런 이유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면 친지, 다른 형제, 조부모, 학교나 학원의 선생님, 동네 어른도 어머니, 아버지 역할을 해줄 수 있다. <페인트>가 제시하는 시설, 버려진 아이들 양육에 최선을 다하는 그 시스템, 그 또한 나쁘지 않은 대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