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과 헝겊 토끼인형 만들기 1
한 동안 브런치 글을 안 썼다(못 썼다?). 계획했던 '독서하기 딱 좋은 사춘기' 연재를 성황리(?)에 마치고 '독서하기 딱 좋은 갱년기'도 25회 차로 쓸 계획이었지만 나중으로 미룬다. 원래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선별해 볼 생각이었지만 '사춘기 독서'가 라이킷 수 30 넘기기를 어려웠던 것처럼 사춘기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사실상 독서할 시간과 정신적 여력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책을 인생의 동반자이자 직업적 자양분으로 삼고 사는 활자중독자인 나조차도 가장 책을 못 읽은 시절이 아이들 중고등학생 때였다. 둘째 아이가 고1이 되자 다시 독서에 속도가 붙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읽는 이 가 많건 적건 상관없이 언젠가 '독서하기 딱 좋은 갱년기'는 쓸 것이다. 묵직한 책들을 들고 오리라.
갱년기 독서가 아니어도 브런치로 쓰고 싶은 글은 많다. 그럼에도 지난 한 달, 심지어 방학이었는데도 글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바빴다. 가정사를 차치하고라도 독서도 글쓰기도 거의 못 할 만큼 몰입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번 방학에 주로 한 일은 1. 칼 세이건의 <창백한 푸른 점>을 원서로 읽기. 2. 듀오링고 앱과 다락원 자습서로 스페인어 공부하기.
그러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일은 '헝겊 토끼인형 만들기'이다. 손에 익숙할 만큼, 가장 예쁜 디자인으로 만들려다 보니 여러 옷감에 여러 디자인에 여러 바느질 방식을 혼자 익혀나가며 인형을 네댓 개 넘게 만들었나 보다. 이걸 왜 하는가? 나에게는 원대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새 학년도에 학교 동아리에서 '손바느질 인형 만들기'를 해보려는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고작 두 시간, 그러니까 일 년 다 해야 16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이지만 학생들에게 일 년에 걸쳐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인형 하나를 스스로 만들어 보게 하려는 거다. 키가 50센티 정도 되는, 품에 꼭 안을 수 있는 포근한 헝겊 토끼 인형 만들기 동아리를 열어보려 한다. 문제는 나 자신이 바느질 뜨개질 재봉 자수 등을 즐겨 하지만 정작 인형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 올 겨울 그걸 연습하느라 한 달이 훌쩍 지나간다.
Hacer muñecos con los niños(소년들과 인형 만들기)
좋다, 그래, 그거 재미있겠네, 근데 그게 뭐?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다. 다만 이건 좀 알려드려야 할 것 같다. 우리 학교는 남자중학교다. 남자중학생들에게 손바느질을 하나하나 가르쳐 인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원래 교육과정상으로는 초 5학년 때쯤 손바느질로 파우치 만들기 같은 걸 하는 학교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학교마다 교사마다 달라서 우리 집 아이들이나 조카들을 보면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바느질 같은 건 전혀 해본 일 없는 아이들도 있다. 특히 남자아이들이 바느질을 배웠다는 얘긴 들은 게 없다. 그런데, 의외로 남자아이들 이런 걸 좋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년에도 내가 운영한 동아리 '만화연구반' 열아홉 명의 아이들에게 "내년에는 만화반을 하지 않을 것이다(참고로 나는 국어교사이고 그림은 취미로 혼자 끼적이는 수준이고 만화를 그를 만큼의 실력이 못 된다. 아이들과 기초과정만 겨우 해내는 수준이라 커리큘럼이 1년 치 이상 있을 리 없기에 동아리는 2년 연속할 수가 없다). 대신 인형 만들기 반을 할 건데, 혹시 따라 올 사람?" 하고 물었다. 원준이가 손을 번쩍 든다. 전교에서 다섯 명은 신청하지 않을까?
1. 4월 첫 시간엔 바늘에 실 꿰는 법부터 가르쳐 준다. 간단히 홈질 박음질 정도 배운다.
2. 5월 둘째 시간, 파우치를 만들어 본다.
3. 6월 손에 쏙 들어가는 인형 모양의 시침핀꽂이를 만든다.
4. 7월 시침핀꽂이를 완성하고 진짜로 만들 인형 본을 헝겊에 옮겨 그린 후 재단한다.
5. 8월 헝겊을 오리고 박음질을 시작한다.
6. 9월 박음질을 마치고 뒤집어 솜을 넣는다.
7. 10월 몸통과 팔다리, 귀를 연결한다.
8. 11월 인형을 완성한다(학교 축제에 전시한다).
9. 12월 마지막 시간 - 다음에 만들어 보고 싶은 인형을 디자인한다.
쓸데없이 공이 많이 들어가는 수업이 될 수 있다. 바느질 장면을 유튜브에서 찾거나 직접 촬영하여 ppt로 만들어야 하고 돌아다니며 하나씩 지도해 줘야 할 것이다. 바느질을 좋아하는 나도 여러 개의 인형을 만들며 실패를 거듭했는데 처음 바느질을 하는 열대여섯 살의 남자중학생들이 잘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면 학생들은 항상 나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곤 했다. 지금도 모둠수업을 많이 하는데, 잘할 수 있을까 걱정하는 데 비해 수업을 즐기고 더 많은 것을 내놓는 아이들 모습을 봐왔기에 보통 수업의 두 배 이상 공력이 드는 모둠수업, 활동 수업을 지치지 않고 해올 수 있었다. 교사 혼자 설명하는 수업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활력과 즐거움이 팡팡 터지는 수업을 지난 수십 년간 경험했다. 이번에도 아이들을 믿어 보려고 한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하게 멋진 인형들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은 무럭무럭 커서 이다음에 자기 아이들에게 토끼인형을 만들어주는 아빠들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중학교 때 만든 퀼팅 자수 이불을 나의 아기들에게 덮어주고 키워냈던 것처럼 이들도 중학교 때 만든 인형을 간직했다가 자신의 아기들에게 "이거 아빠가 열다섯 살에 직접 한 땀 한 땀 바느질해서 만든 인형이란다." 하면서 안겨줄지도 모른다. 한, 15년쯤 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