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언어 - 박준
소설가의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라는 것을 얼마 전 시인의 강연회에서 알았다. 옆에 앉아 있던 한 선생님이 추천하신 책이다. 시인의 강의가 좋기도 하고, 언뜻 본 시어가 예뻐 집에 오는 길에 이 도서관에 들러 이 책을 빌려 왔었다. 기드온 루빈의 얼굴 없는 그림을 일부러 표지에 넣었다는 시인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신문 위에 과슈로 그린 그림이라고 되어 있다. 수성 페인트인 과슈를 신문지 위에 그려도 된다는 걸 처음 알았다. 미술학원 선생님이 과슈그림을 다음에 그려보자고 했는데 그동안 수채화에 빠져 있느라 물감만 사 두고 아직 그려보지 못했다. 아마도 조만간 도전해보지 않을까 싶다. 어굴 없는 그림을 그린 건 911 테러가 계기였다고 한다. 얼굴이 없기에 더 상상하게 되는 그림이다.
이 책에는 시도 가혹 등장하고, 시와 산문의 경계가 모호한 글도 있다. 저자가 산문이라고 했으니 시집은 아닌 것이다. 산문의 문장들도 시어처럼 아름답다. 시에서 느꼈던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산문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여행에 관한 부분이나 음식 이야기에서 나와 똑같다는 생각에 과하게 공감했다. 사약의 사자가 죽을 사가 아니라 줄 사라는 건 처음 알았다.
저자는 여행을 즐긴다. 직장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삶이기에 조금은 가난했을지 몰라도 행복했으리라. 봄이 되면 통영에 가서 도다리쑥국을 먹고 싶은 병에 걸리는 시인은 올봄에 다녀왔는지 모르겠다. 시 속에 늘 서려 있던 죽음은 유서라는 말들에서 비장하게 남겨진다. 아픔도 많이 겪었던 그의 생이 글에 고스란히 녹은 탓일 게다. 그래도 얼마 전에 보았던 시인의 얼굴은 밝았다. 아마도 시와 산문을 스면서 자신의 아픔과 어두운 과거,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안쓰러운 사람들을 기린 후 회복했는지도 모르겠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한바탕 크게 울고 다시 기운을 차리는 사람이 씩씩한 법이다. 마음에 담아둔 아픔은 사람을 병들게 한다. 지금까지 두 권의 책을 읽었다. 아직 남은 시인의 책이 만다는 게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