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
제목만 보고 동화인 줄 알았다. 책날개를 보고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 중 하나라는 걸 알았다. 패션잡지 <앙앙>에 실렸던 에피소드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소설가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하루키 특유의 무심한 듯 유머러스한 문장들에서 한 번씩 웃고 지나갈 수 있었다.
내용 중 단연 좋았던 부분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이다. 소재에 관해 걱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 미리 50개의 소재를 생각해 두고, 계속 첨가한다고 한다. 나도 이제부터라도 쓸거리를 적어두어야겠다. 요즘은 구글독스나 핸드폰 메모장에 아이디어를 적고 있다. 아날로그를 고집했던 내가 이제 전자책도 많이 읽고, 온라인 글쓰기도 즐긴다. 언제 어디서든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다. 책장을 넘기고 꾹꾹 눌러쓰는 재미와 행복감은 줄 수 없지만.
책을 읽으며 작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얼떨결에 소설가가 되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하루키는 그동안 좋은 평만 들었을 리 없다. 그럴 때마다 이만하기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니 참 긍정적인 사람이다. 여행할 때는 버릴 만한 옷을 챙겨 갔다가 버리고 온다. 가방에 대한 생각은 나와 닮았다. 캐리어보다는 백팩을 즐긴다. 집을 미니멀하게 바꾸듯 여행 짐도 서서히 줄어 2박 3일이면 작은 백팩 하나면 충분하디. 대신 버릴 옷을 넣어가진 못한다. 버릴 옷이면 이미 버려서일까?
소설가가 상상하는 대로 쓴 글이 실제와 닮았다는 것이 놀랍다. 아마도 그가 그전에 비슷한 곳에 갔던 기억 때문에 오류 없이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상상했던 몽골의 한 장소가 실제로 그랬다고 한다면, 아마도 그건 온라인에 떠도는 그림을 참고했거나, 과거 여행에서 본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모든 것을 실감 나게 상상해 적을 수 있는 능력이 한없이 부럽긴 하다. 문체를 옷 입는 것에 비유한 것도 좋았다. 이러다 하루키의 문체를 닮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루키의 '무라카미 라디오' 시리즈를 더 찾아볼 거라는 건 확실하다.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 가끔 들추며 글 쓸 동력을 찾게 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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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경우, 얘깃거리가 없어서 곤란한 일은 없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대충 오십 개 정도 토픽을 준비해 두기 때문에 거기서 '이번에는 이걸로 가자' 하고 적당히 골라 글을 쓴다. 물론 날마다 생활 속에서 새로운 화재가 자연스레 생겨나니 그것들도 목록에 덧붙인다. (12쪽)
소설가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날마다 출퇴근을 하지 않아도 되고 회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가 없는 것만으로 인생의 시간은 대폭 절약된다. (60쪽)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가 있다. 그건 원래 '개미와 매미' 이야기였다. 그리스에서는 매미가 서식하므로 이솝은 아주 자연스럽게 매미를 등장시켰다. 그런데 북유럽 사람들은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매미를 베짱이로 바꿔버렸다나. (100쪽)
나이를 먹어서 젊을 때보다 편해졌구나 하는 일이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예를 들어 '상처를 잘 입지 않게 된 것'도 그중 하나다. 누군가에게 뭔가 심한 말을 듣거나 뭔가 심한 일을 당해도, 젊을 때처럼 그게 가슴에 콕 박혀 밤잠을 설치는 일은 적어졌다. (144쪽)
소설가에게 또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기본이 낙관적이라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닌가, 늘 생각한다. 이를테면 장편소설 편집에 들어갈 때는 '좋아, 이건 꼭 완성할 수 있어'하는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 능력으로는 이걸 다 쓸 수 없을지도'같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낙관적이라기보다 그저 뻔뻔스러움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158쪽)
나 같은 평범한 소설가도 상상 속에서밖에 볼 수 없는 것을 매우 리얼한 실물로 보는 일이 있다고 할까, 보고 있다고 느끼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나는 모르는 장소에 대해 쓰는 걸 좋아한다. 한 번도 간 적 없는 몽골 작은 마을의, 시코쿠의 잘 모르는 마을의 정경을 묘사한다. 상상력을 구사하여 '이곳은 아마 이러이러한 곳으로 이러이러한 사람이 살고 있겠지' 짐작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마치 본 것처럼 구체적으로 써나간다. 그런 작업은 무척 즐겁다. 실제로 본 적 있는 풍경보다 오히려 마음껏 생생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다 쓰고 난 뒤, 실제 그 장소에 가보는 일이 있다. '혹시 엄청나게 터무니없는 걸 쓴 건 아닐까' 조마조마하면서 가보지만, 대부분의 경우 '뭐야, 내가 쓴 대로잖아?" 하게 된다. 내가 책상 앞에서 상상한 그대로의 풍경이 그곳에 있다. 나무가 자란 모습이며 강이 흐르는 모습이며 공기 냄새며, 세부에 이르기까지 깜짝 놀랄 정도로 똑같다. (202-203쪽)
일단 전업 소설가라는 간판을 내걸고 생활하고 있으니, 따가운 눈총을 받을 때도 있다. 흙덩어리가 날아오기도 한다. 여간해서는 상처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야. 더 비참한 지경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도촬과 데이트 폭력만은 하지 않아야지' 하고 긍정적으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2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