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리 작가의 책을 세 권째 읽었다, 아니 들었다. 그녀가 남긴 책이 몇 권 안 된다는 게 슬프다. 운전하면서 듣고, 길을 걸으면서 들었다. 읽을 수 있는 데서는 읽었다. 합체에 비해 고통이 많은 슬픔 가득한 이야기이다. 사람들을 살리는 소방관의 아들이지만 정작 가정에서 아빠는 엄청난 폭력을 행사하는 폭력배에 지나지 않았다. 매일 얻어맞고도 아침을 차리는 엄마와 아빠의 폭력을 피해 도망 다니는 누나와 화자가 살고 있는 집은 스위트홈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는 이 방, 저 방으로 피했지만 조금 크면서부터는 집 밖으로 나가 주차장으로도 피했다. 어느 날 공사장에서 발견한 맨홀 뚜껑을 열고 들어간 곳에서 누나와 무섭지만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기 시작한다. 점점 자란 누나는 언젠가부터 맨홀을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고, '나'는 한동안 외롭게 그곳을 지킨다.
이야기의 시작은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을 수용하는 청소년 보호관찰에서 축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어떤 사연으로 왔는지 모를 아이들은 원래 순진했던 양 축구를 하고, 밥을 먹지만 알고 보면 샤프로 앞 친구를 사정없이 찌르기도 하고, '나'처럼 사람을 죽이기도 했다는 사실은 그곳에서의 생활이 달콤하지만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밤마다 우는 아이, 잠꼬대로 욕을 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과거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어렸을 때는 친했지만 크면서 자신이 좋아하던 연극인 양 연기하는 것만 같은 속을 알 수 없는 누나와 잦은 폭력에도 저항하지 않던 엄마는 아버지의 사고사 이후 오히려 아빠를 두둔하며 '나'의 속을 뒤집는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아빠의 평판은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낮춰주기도 한다. 오묘한 모순 속에서 십 대의 끝자락을 보내는 '나'는 작은 일에도 수없이 흔들리며 나약하면서도 반항적인 모습을 보인다.
주인공의 마음을 따라가며 깊은 상실감과 아픔을 느끼게 만드는 저자의 세밀한 묘사로 인해 책을 아주 실감 나게 읽었다. 지나가다 보았던 맨홀이 이 긴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 주었다니 작가의 눈에는 허투루 지나칠 게 없는 모양이다. 매일 두 시간씩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누군가에게는 피난처가, 누군가에게는 범죄 은닉처가 될 수도 있었던 맨홀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을까? 모양은 다르겠지만 말이다. 작가의 책을 읽을수록 참 아까운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커진다. 이제 몇 권 남지 않은 책들을 마저 읽으며 작가를 추모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