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을 하고 가족과 저녁을 먹고, 남편이 TV를 틀면 그때부터 나의 바이올린 연습이 시작된다. 기초 스케일부터 시작해서 쉬프팅까지 하면 약 15분. 정말 짧은 기초 연습이지만 시간이 부족한 나에게는 생명줄 같은 시간이다. 그 후에야 연습곡이나 다른 곡을 시작한다. 남편과 다툰 날, 직장에서 스트레스받은 날,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멀미가 나는 날, 나는 드레스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활을 박박 긋고 나면 속이 확 풀린다. 거울이 있으면 좋겠지만 사방이 옷으로 가득하고 활이 겨우 닿지 않게 연습 가능할 정도로 협소하여 들여놓기 어렵다. 두 명이 들어가기 어렵도록 좁고 유리창이 없어 빛이 들어오지도 않는 어둑한 드레스룸이지만 옷이 흡음 역할을 하여 방문과 함께 닫으면 가족들의 안녕은 물론 늦은 시간에도 이웃 걱정하지 않고 연습할 수 있다.
아주 오래전 가족들이 시끄러워하는 줄도 모르고 방에서 연습했었는데 청소년이 되면서부터는 저녁마다 연습하기가 눈치 보였다. 약음기를 끼고 연습을 하면 바이올린 소리가 안 좋아진다는 말을 듣고는 그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연습을 하고 싶어도 마음껏 하지 못하는 마음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드레스룸이다. 유레카! 처음에는 밀폐된 공간에 갇힌 듯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나아졌다.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서늘하여 좋은 조건은 아니지만 마음 놓고 연습할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이 아파트는 구조가 동마다 다르게 생긴 것이 특징인데 드레스룸이 없는 구조도 많다고 한다. 앞으로 건물 짓는 분들은 악기 연습하는 분들을 위해 작은 드레스룸을 필수 옵션으로 넣어 주면 좋겠다.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계속 드레스룸에서 연습하다가 졸업연주회를 앞두고는 하루 네 시간 연습에 돌입하는 바람에 집 앞에 있는 실용음악학원을 연습실로 빌렸다. 룸이 여러 개 있어서 아무 때나 빈 곳을 찾아 들어가면 되고 가장 좋은 것은 번호 키로 언제든 열고 들어가서 연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서 졸업연주까지 무사히 마친 후 얼마 안 있어 학원이 차로 10분 거리로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거기로 연습을 다녔으나, 졸업연주도 끝났고, 이동 시간이 아까워 그냥 다시 옷장 연습을 시작했다.
즐겨 가는 바이올린 인터넷 카페에서 집에 방음시설을 설치하는 분들을 많이 보았다.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는 (실천은 잘 못하는) 나는 집 안에 새로운 가리개 시설을 들이는 것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드레스룸이 없었으면 아마도 무리해 가며 설치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스러운 나의 옷장, 음악과의 은밀한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