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ly Feb 26. 2021

바틀비를 만난다면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은 살아생전에는 큰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너새니얼 호손을 동경하여 그의 집 근처 농장에서 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바틀비는 어쩌면 작가 자신의 단면일지 모른다. 


  화자인 변호사는 터키와 니퍼즈라는 별명을 가진 두 명의 필경사를 고용하고 있었다. 일이 많아지면서 한 명을 더 고용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데 이때 바틀비를 채용하게 된다. 처음에는 아주 일을 꼼꼼하게 해 화자를 만족시킨다. 하지만 점차 자신이 하기 싫은 서류검토 작업을 거부하면서 화자를 곤경에 빠트리기 시작한다. 그의 기이한 행동은 갈수록 정도가 심해져 심지어 화자는 자신의 책상에서 꿈쩍 않는 바틀비를 피해 사무실을 옮기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건물을 나가지 않고 배회하던 바틀비는 건물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화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나 고집 세고 무기력한 바틀비를 보며 끝까지 인내하고 도우려 했던 화자였지만 어떻게 보면 바틀비가 망가지도록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물론 자의가 아니었지요. 바틀비가 하기 싫은 일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심지어 먹는 것마저 포기한 그는 어떤 생각으로 지냈을지 정말 궁금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단지 화자의 짐작에 주인을 잃은 편지를 태우는 일을 하던 것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코로나로 요즘 우울한 학생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게 아닌지 걱정스럽다. 무기력하거나 해야 할 것들을 하지 않는 아이들이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모두가 다 잘 따라와 주면 좋겠지만 개인적이거나 가정적인 이유로 한없이 작아지는 아이들을 주변에서 보게 된다. 바틀비가 세상에 나온 1853년은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데 이런 인물이 당시에도 있었다는 것이 놀랍다. 물론 작가가 상상으로 만든 인물이긴 하지만 현대에 있을 법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을 이미 그 당시에 그렸다는 것은 그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일까, 아니면 작가의 예상일까? 산업이 극도로 발달하고, SNS만으로는 모두가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우울한 기분을 느끼는 것, 사회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시대의 불행한 바틀비가 더 이상 생겨나지 않도록 기술 발달도 좋고, 경제적 풍요도 좋지만 사람을 최우선에 두어야겠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 속 대사가 생각난다. “회사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입니다!”


  앞으로 하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보게 된다. 나의 의견만을 강요하는 것도, 상대의 말대로 모든 걸 포기하는 것도 옳지 않은 것 같다. 학생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최선을 다해 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결국 먹기도 거부하고 죽음에 이른 바틀비는 마음의 병이 든 것이었을까,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은 동안 행복했을까? 공교롭게도 다음에 빌린 책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권리>>였다. 바틀비는 아마도 이 권리를 강력히 행사했던 사람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바램일 수도 있다. 바틀비의 최후를 비참하게 그린 허먼 멜빌이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작품을 쓰기보다는 자신이 쓰고 싶은 내용만 쓰고자 했던 외로운 그의 삶을 반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목소리 리뷰: https://www.podty.me/episode/15370159

매거진의 이전글 아침마다 함께 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