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위의 산책자 (양철주)
코로나에 걸렸다. 나는 안 걸릴 줄 알았는데 비켜가지 않았다. 이틀 후 남편도 코 찌른 지 여섯 번째 만에 양성이 되어 함께 방에 들어앉았다. 이틀 동안 자유를 누렸으나 마음이 불편했다면 지금은 조금은 불편해도 든든하다. 다행히 첫날 찢어질 것처럼 아프던 목은 약 먹고 바로 좋아졌고, 몸살이나 두통도 없어 찌뿌둥한 것 빼곤 컨디션이 괜찮다. 내게 주어진 긴 시간을 무얼 하면 좋을까 하다가 1학기 초에 끼적이던 원고를 꺼냈다. 다시 읽어보니 나름 괜찮은 것 같아 조금 더 손을 본 후 책 리뷰 쓰면서 알게 된 박균호 작가님이 알려주신 편집자님께 이메일을 보내보았다.
결과는 처참했다. 내가 쓴 글은 잔소리에 가까워 독자가 읽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며, 작가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은 희미한 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기분이 나쁜 게 아니라 새로운 희망으로 다가왔다. 사실 처음으로 책을 쓰면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데 무턱대고 쓰다 보니 다른 책 인용을 많이 넣어 딱딱하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책을 써보라고 의뢰해 주신 출판사 분이 학부모를 위한 문학적이지 않은 책을 요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용은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자비 출판사인 듯 보였다. 책 쓰기의 이정표를 제시할 편집자가 몹시 절실한 나는 첫 의뢰인 분께 죄송하지만 다른 곳에서 출판하겠다고 하고 박균호 작가님께 문의드렸던 터였다.
작가님이 알려주신 편집자님께 세 번의 메일을 보낸 끝에 전화 통화를 하게 되었다. 간단한 몇 마디 하고 끝날 줄 알았는데 너무나 자세히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시는 걸 들으며 바로 메모를 했다. 사람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교실 모습이라는 것, 해상도를 높여 문제 상황을 자세히 묘사하라는 것이다. 전국 어디에나 있는 게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이야기. 머릿속에 불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좀 고쳐볼까 하다가 완전히 새로 쓰기로 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렇게 몇 장을 새로 쓰다가 이 책을 집어 들었다. 한 블로그 이웃 분이 이 책을 필사하신다는 걸 보고 얼마나 좋기에 소중한 시간 동안 베껴 쓰나, 싶어 검색하니 아직 도서관에 들어와 있지 않은 따끈한 신간이었다. 그때 바로 주문을 하고 도착한 것이었다. 두껍지 않은 책이 연분홍 표지에 싸여 아름답게 만들어져 있었다. 편집자 출신 저자의 책이라 그런지 읽기 쉬운 독특한 내부가 마음에 쏙 들었다. 나의 편집자님께 이런 책을 만들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시구 같은 문장에 빠져들었다. 할머니의 이야기. 바로 이거구나!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나만의 경험, 나만의 생각이 글에 그대로 드러나게 써야 하는 것이었다. 독자가 눈으로 그릴 수 있게. 책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되니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천천히 읽어야 했는데 나도 좋은 문장을 써보고 싶어 얼른 읽고 만년필을 가져와 옮겨 적기 시작했다.
저자는 내가 읽기에도 버거웠던 책들을 오랜 시간 동안 연필로 사각사각 공책에 필사했다. 인문학 모임 책이어서 힘겹게 읽었던 「모비 딕」을 썼음은 물론 그 방대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두 가지 버전으로 필사했다. 세 번째 도전에 겨우 읽었던 「말테의 수기」를 저자는 편집자로 인생을 활활 태우던 시기에 막차를 못 타고 일하던 날, 밤새워 읽고 필사를 시작했다. 내가 아직 읽어보지 못한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몽테뉴의 「인생 에세이」, 보들레르 「벌거벗은 내 마음」과 「파리의 우울」, 장 그르니에의 「어느 개의 죽음에 관하여」와 「지중해의 영감」, 카뮈의 「결혼•여름」을 오랜 시간 적어 내려갔다.
원래 시인을 꿈꾸던 분이라 문장이 좋은 것인지, 필사를 하며 작가의 정수를 뽑아낸 오랜 시간의 단련 덕분인지 주옥같은 부분들이 많아 나도 공책에 여러 장 옮겨 적었다. 바쁜 중에 미련스럽게 보이기까지 하는 필사라는 다소 무식한 방법을 통해 저자는 상처를 치유하고, 꿈을 꾸었을 것이다. 깊이 있게 우려낸 홍차의 맛처럼 앞으로 저자는 또 얼마나 삶의 지혜를 엮은 책들을 세상에 내보내게 될까?
책을 읽으면서 나도 얇은 책 하나 필사해 볼까,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감히 시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이 늘 너무 많고 나의 일상이 분주했기 때문이다. 코로나로 격리된 시간이 감사할 정도로 마음이 늘 들떠 있었다. 나만의 편집자님과의 전화 만남 이후,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빠르게 움직이던 자동 트레일러에서 내려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내가 세워둔 수많은 원칙들을 조금은 내려놓고 시간을 좀 다르게 흘러가게 해야겠다. 내 인생의 작은 전환점이다.
* 목소리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