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1
개학을 이틀 앞두고 출근을 했다. 교실을 정리하고, 2학기 교과서를 각반에 나누고, 같은 학년 선생님들과 2학기 계획에 대한 회의를 마친 후 함께 점심을 먹었다. 하루 남은 방학을 아쉬워하며 헤어지던 중 부장님이 말씀하셨다.
“2박 3일 같은 하루 보내세요. 목요일에 만나요!”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계속 남아 있었다. 저녁에 책을 읽다가 갑자기 하루를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생각하게 되었다. 코로나로 계속 가지 못했던 사려니 숲길을 걸어볼까? 실행력이 뛰어난 편인 나는 바로 제주항공에 검색했다가 새벽에 출발해 밤에 돌아오는 왕복 비행기가 생각보다 저렴해 바로 예매를 해버렸다. 새벽에 갔다가 저녁 비행기로 오는 건 아직 해본 일이 없어 걱정되긴 했지만 알찬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내 사랑 사려니 숲을 걸을 수 있다니!
새벽 3시 반쯤 깨어 더 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4시가 조금 지나 씻었다. 막내는 그제야 친구와 동네 편의점에서 놀다가 들어왔다. 투덜대는 남편 옆에서 꼼꼼히 챙기느라 챙겼는데 결국 칫솔 세트를 빼먹었다.
운전하여 공항 주차장에 도착했다. 새벽 시간이라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은 데다가 모바일 탑승권을 미리 예약해 두어 바로 검색대를 통화해 들어갔다. 오랜만에 타는 비행기라 탑승구를 좌석번호로 잘못 보고 23A를 찾다가 20까지밖에 없는 탑승구 옆에 있는 승무원에게 물어 그게 좌석번호임을 알았다. 너무 창피했다. 다음에는 전광판을 미리 확인해야겠다.
시간이 좀 남았는데 새벽에 일어나서 그런지 눈도, 몸도 몹시 피곤했지만 눈을 감으면 잠들어버릴까 봐 ‘계속 읽기: 나의 단어로’라는 책을 펼쳐 읽었다. 아껴 읽고 싶은 좋은 책이다.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조금 늦게 탑승했더니 창가 자리인 내 자리 옆에 두 노신사 분들이 이미 자리 잡고 앉아 계시다가 나를 보고 벨트를 어렵사리 풀고 일어나 주셨다. 그제야 넋 놓고 잠을 잤다. ‘이륙하겠습니다’라는 말은 들은 것 같은데 이륙하는 걸 보지는 못했다. 착륙을 얼마 앞두고 일어나 유튜브 영상 만들 때 쓸 하늘 사진들을 몇 장 찍었다. 뒷자리에서도 촬영하는 소리가 들렸다.
7:50
비행기에서 내려 터미널로 가 간단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검색하니 43-2번에 터미널에 간다고 되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탔는데 한참을 가다 보니 용두암 쪽을 지나 생소한 정류장 이름들이 나와 다시 검색하니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반대쪽에서 탔어야 했나 보다. 놀라서 얼른 내렸지만 반대쪽에서 같은 버스를 타려면 거의 3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한적한 곳이라 터미널 가는 다른 버스들도 거의 없었다. 혹시나 하여 정거장 네 개 정도를 걸어 내려왔건만 원래 타고 왔던 버스가 가장 먼저 온다고 되어 있어 기다렸다 같은 버스를 타고 터미널에 도착했다.
8:52
버스를 잘못 타서 한 시간을 허비하다니. 배도 엄청 고팠다. 어쩐지 공항에서 터미널까지 금방이었는데 오래간다 싶었다. 터미널 안에서 먹을까 하다가 반대편에 김밥, 분식집이 있어 그곳으로 갔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아직 준비가 안 되어 김밥은 안 되고 라면만 된다고 하셔서 떡라면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아침까지 먹고 나니 든든했다. 터미널 앞에서 사려니 숲길 가는 버스가 많았는데 이상하게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하나도 안 오는 것이다. 나중에 벽에 씌어 있는 글을 보니 내가 타려고 하는 간선버스는 터미널 내부 정류장을 이용하라고 되어 있었다. 안쪽을 보니 타려던 버스가 정차되어 있었고, 내가 타자마자 출발했다.
10:40
그전에 왔을 때 늘 통과한 후 도착했던 안내소가 있는 곳이 사려니숲길 입구라고 되어 있어 얼른 내렸다. 늘 붉은오름에서 출발해 이쪽으로 나왔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여서 정류장이 반가웠다. 사람들 몇 명이 있었다. 안쪽에 화장실이 몇 개 없음을 알고 있기에 일단 화장실부터 들렀다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숲길에 들어섰다. 바로 이거다.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바람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걷는 길이 천국과 다르지 않았다. 쉴까 하다가 계속 조금만 더 가서, 하는 생각으로 걷다가 거의 중간에 다 와서야 벤치에 앉았다. 고속도로 달리던 열받은 차가 휴게소에 들르는 느낌이었지만 사실 목은 그리 마르지 않았고,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빨리 중간까지 도착하는 느낌이었다.
숲길에 들어섰을 때 ‘악, 악’ 하던 새들이 많았는데 중간쯤에는 ‘트윗, 트윗’하는 새소리가 들렸다. 한참을 더 가니 다시 ‘악, 악’하는 새가 등장했는데 한 마리는 가래 끓는 소리를 내서 너무 웃겼다. 새들도 가래가 생기는 것일까? 노루도 한 마리 만났다. 해 질 녘 인적이 드물던 그전에는 여러 마리 보았는데 이번에는 한 마리만 가까이에서 보았다.
태권도를 해서인지 다리가 한결 덜 아팠다. 처음에 들리던 새소리, 바람소리도 중반 이후에는 별로 들리지 않고 오직 걷는 데만 집중하게 되었다. 더 이상 쉬지 않고 끝까지 갈까 하다가 배낭을 멘 어깨가 너무 아파 잠깐 앉았다. 붉은오름으로 갈수록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옷차림이 휴양지 패션으로 변해 갔다. 슬리퍼를 신은 분들도 계셨다. 작은 돌들이 많아 사려니를 통과하기에는 발이 많이 아플 신발이다.
사람들이 북적였다. 붉은오름에 도착한 시간은 1시 16분. 쉰 시간을 제외하고 딱 2시간 30분이 걸렸다. 처음 사려니 갔을 때는 사잇길도 기웃거리고 천천히 걷고 많이 쉬어서인지 3시간 반이 걸렸는데 시간이 점점 단축된다. 다음에는 2시간 30분 벽을 깨고 싶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