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철학자 (에릭 호퍼)
병원에 가져갈 책을 고르러 급히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그동안 블로그에선가 제목을 많이 들었던 터라 보자마자 골라 들었다. 오래전부터 제목을 들었는데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을까? 슬쩍 훑어본 내용만으로도 흥미로웠는데 말이다. 사람의 만남도 그렇듯 책도 만나는 때가 있나 보다.
그의 자서전 제목과 같이 그는 그야말로 ‘길 위의 철학자’였다. 서재에 앉아 책만 읽고 연구하는 철학자가 아니라 수많은 노동(농사, 수확, 레스토랑 웨이터 보조, 사금 채취공, 부두 노동자 등)을 하면서 책을 읽고 독학을 했다. 열심히 일하는 그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이 수없이 많았고, 실제로 꽤 오래 머물기도 했지만 정작 그가 정착 생활을 했다고 할 수 있는 건 마지막 부두 노동자 시절이다. 책을 많이 출판하고 부두에 있는 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노동과는 멀어지긴 했지만 그가 선택한 정착지는 그가 일하던 장소 근처였으니 그가 노동을 얼마나 신성시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조금 남다른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와 그는 계단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겪는데 어머니는 회복하지 못한 채 2년 후에 돌아가시고 자신은 시력을 잃게 된다. 음악을 사랑하는 아버지 덕분에 아홉 살 때 베토벤이 귀가 먼 후 작곡한 교향곡 9번을 듣고 그는 희망을 느낀다. 잃었던 시력을 15살에 회복하지만 집안 내력 상 마흔 살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말을 자신을 돌봐주던 마르타에게 듣고 떠돌이 생활을 마음 편히 하며 여행객 같은 삶을 산다. 시력을 회복하고 들렀던 헌책방에서 ‘백치’라는 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그건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들은 적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도스토예스키의 그 책을 매년 다시 읽는다는 것을 보고 나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그 책을 주문했다. 아버지는 마흔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고, 장례 후 받은 300달러를 들고 로스앤젤레스에 간다.
돈을 다 쓴 후 빈민가의 무료 직업소개소 문을 두드리는 것을 시작으로 돈이 있을 때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돈이 떨어지면 노동을 하는 일을 반복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과 구약성서에 심취하기도 했고, 산보와 식사, 독서와 공부, 그리고 낙서를 하는 일상이 계속되던 중 여생을 계속 그렇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그를 좌절로 이끌었다. 죽을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기던 중 돌이킨 그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난다.
그가 사상가로 거듭나게 된 것은 엘센트로 임시수용소이다. 이후 50년 동안 쓸 글의 씨앗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는 어느 날 오른손이 불구인 한 노인을 보고 자신의 관찰력을 탓하며 이후로는 주변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떠돌이 동료들을 인간 물체로까지 여기며 사회 부적응자들이라는 생각을 가진 채 4주 후 수용소를 나온다. 떠돌이 생활 중 많은 이들을 만나 교류하는데 많은 책을 읽고 나름의 지식을 얻어가는 그는 남들이 볼 때 점점 매력적인 사람으로 변해간 것 같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정성껏 저녁 식사를 준비했던 마리오라는 이탈리아인도 있었고, 헬렌이라는 사랑하는 여대생도 있었다. 헬렌은 버클리에 머물면서 연구하기를 권했지만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목화밭에서 만난 마음 통하는 동료에게 헬렌과 친구를 만나게 해 줄 생각으로 올라탄 화물열차에서 자신에게 건너오다 죽음에 이른 앤슬리의 일화가 안타까웠다.
떠돌아다니던 그는 2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부두 노동자로 정착했다. 그의 사상의 근간은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천성적인 독서광이라 여겨지는 그는 떠돌아다니는 가운데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독학을 했다. 궁금한 게 있으면 책을 파고들어 전문가 못지않은 식견을 갖기도 했다. 남다른 이력의 소유자인 그가 각광받는 이유는 남들이 기피하는 방랑생활과 수많은 노동, 그리고 그 와중에 책으로 지식을 쌓은 것이리라. 그가 택한 연구실이 서재가 아닌 노동 현장이었을 뿐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좋은 대우를 받으며 정착해 조금 일하고 많이 쉬며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한없이 읽는 선택을 할 것 같은데 그는 오히려 안정을 거부하고 다시 길 위로 나선 것이 놀랍다. 아마도 길 위가 자신을 늘 깨어있게 해 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길 위의 철학이라는 분야를 몸소 개척한 진정한 개척자인 것 같다.
* 목소리 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