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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Mar 28. 2021

여행의 구실

곽재구의 포구기행

  제목만 많이 들었던 이 책을 좋은 이웃 영맨님의 블로그에서 보고 마음에 담아 두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하고 빌려 왔다. 내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을 얼마 전에 깨닫고 그 후로는 바다가 더 좋아졌다. 얼마 전에 본 제주 해변과 포구도, 어릴 적 기억 속 바다도, 즐겨 가는 뱃터도 모두 정겹고, 아름답다. 이 책은 그냥 아름답기만 한 바다가 아닌 생계를 위한 일터에서 삶의 끊임없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으려 했던 한 시인의 고뇌가 담긴 것이다.


  내가 철이 든 후 가장 좋은 바다에 대한 기억은 대학교 4학년 때 졸업을 앞두고 졸업 작품을 그리기 위해 삼천포 바다에 아버지와 단둘이 여행한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어딘가에 갔던 기억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고등학교 때 멀리 등하교하는 딸을 데려다준 몇 번 외에 둘만 어디에 갔던 기억이 거의 없다. 그래서일까 그때 아버지랑 갔던 삼천포 바다는 나에게 추억으로 남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찍은 사진으로 50호짜리 수채화 하나와 유화 하나를 그림으로 그려 졸업작품 전시회에 출품했었다. 그림을 그리며 계속 바다와 아버지를 추억했다는 의미다. 그때 교수님도, 친구들도 왜 좋은 것 다 놔두고 낡고 녹슨 배를 그리느냐고 물었었다. 그런데 녹이 슬어서 좋았고, 배라서 좋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그 배들을 그리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니 누군가를 호화롭게 태워 여행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삶의 애환이 담긴 생계 도구라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애잔하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곽재구 님은 그런 마음으로 하고많은 관광지 중 포구들을 고른 것인지도 모른다.


  책에는 내가 처음 듣는 지명들, 어청도, 구만리 포구, 인지리, 남동리 포구, 화포, 지심도, 상족 포구, 어란 포구가 등장한다. 수없이 많은 포구와 지명들을 가진 곳이 좁은 듯 넓은 이 땅의 삼면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섬들을 에워싸고 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그곳들을 집에 앉아 책으로 다닌다. 시인과 함께 포구를 거닌다. 그런 느낌이다. 책의 뒤로 갈수록 나의 마음은 정말 파도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멈출 수 없는 일렁임. 그건 바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다. 충무에, 여수에, 사천(삼천포)에 가고 싶다. 변산반도로, 제세포로, 선유도로, 화진으로 향한다. 이 책의 부작용(?)이다. 


  여수로 갔다는 충무의 두둥실호는 잘 운항하고 있을까? 시인이 이 책을 쓴지도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의 마음속 버킷리스트인 두둥실호를 끝내 탔을지 궁금하다. 충무에 가면 두리둥실호를 볼 수 있을까? 마음에 담아도 담아도 다 담지 못하는 책의 부분들 때문에 결국 책을 샀다. 2002년 아마도 초판일지 모를 그 책이 1700원에 팔리고 있었다. 배송료보다 적은 돈으로 나는 시인의 설렘 가득했을 그 책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이후 TV에 소개되면서 이 책은 굉장한 유명세를 탔고, 외국에까지 알려졌다. 우리나라의 의미 있는 포구들과 지명에 얽힌 역사 속 인물 이야기들, 그리고 시인이 여행지에서 만난 살아있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이 여행지의 추억을 더 깊게 해 주었다. 실명을 담은 책 속 그들은 지금 잘 살고 있을까? 제자라는 K는 아이와 함께 중년의 나이가 되어 있겠지.


  가끔 오래전 영상을 보면서 저 사람은 아직 생존하고 있을까, 아니면 저세상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하는 때가 있다. 세월은 너무 빠르고 우리는 이 땅을 잠깐 여행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포구를 거닐며 역사와 삶에 대해 생각하고 발걸음을 돌렸던 시인처럼 우리는 똑같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간다. 한 번의 여행. 남들보다 조금 더 갖기 위해 아등바등 영원히 살 것처럼 지내는 건 아닌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도 태연한 바다처럼, 수많은 물고기와 끼니를 위해 그물을 던지는 어부들과, 지친 일상을 뒤로 하고 잠깐의 쉼을 즐기는 이들을 품는 바다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지 않았을까, 포구 여행을 마친 시인은. 책 덕분에 가고 싶은 여행지가 늘었다. 앞으로 내 여행의 구실이 될 것이다.


--- 본문 내용 ---


- 훨훨 날아가렴. 또 다른 어딘가에 마을을 이루고 새로운 꿈을 꾸렴. 그래, 나도 언젠가 그 마을에 이르러 새로운 날들의 시를 쓸 테니……. 사방은 고요하다. 나는 갈대숲 사이를 걸어 다시 내가 사는 도시 속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 나는 종종 안드레아 보첼리의 노래를 듣는다 .아무것도 볼 수 없음으로써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 침묵함으로써 모든 욕망과 영혼의 본질 속으로 여행할 수 있는 시간들. 나는 내 꺾인 날개를 소중하게 바라본다. 고요하게 살아있는 순천만의 모든 생물들, 그들의 꿈, 삶의 지혜들……. 스무 살 적, 시에 젖어들던 그 침묵의 시간들 속으로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122-123쪽)


- 나는 제주바다에서 산방산이 자리한 사계포 앞바다를 많이 사랑한다. 우리나라를 처음 외국에 소개한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표류한 이쪽 땅은 사실 외국인에게 한국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처음 보여줄 만한 곳으로 손색이 없다. 대부분의 제주 어촌들이 고기를 잡아 생계를 잇는 전래의 삶의 방식을 상실해가고 있음에 비하여, 이곳 선창에 즐비하게 늘어선 고기잡이배들을 바라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그들이 밤바다에 집어등을 밝히고 어로 작업을 하는 모습은 단순한 삶의 한 풍경 이상의 따뜻한 빛으로 가슴에 닿아온다. 그러나 이런 이유 외에도 내가 사계포 바다를 사랑하는 이유가 몇 있다. 이곳은 화가 이중섭과 추사 김정희의 예술혼이 쓸쓸하게 고여있는 땅이다. 소 그림으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이중섭은 사실 소보다 훨씬 많은 게 그림을 그렸다. 그의 은박지 그림들을 살펴보면 어김없이 바닷게들이 등장한다. 해방이 되고 625가 터지는 동안 그는 이곳 바다에서 일본인 아내 남덕을 그리워하며 가난과 싸웠다. 그의 많은 끼니를 바닷게들이 해결했고, 자신이 먹은 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그림 속에 게를 그려 넣었던 것이다. (218쪽)


- 충무는 아름다운 포구다. 나라 안의 여러 도시들 중 유일하게 스카이라인이 살아있는 도시. 이중섭과 유치환과 윤이상 들의 예술혼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도시. 나는 우산을 들고 선창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걸었다. 걷다가 여객선 터미널로 걸음을 옮겼다. 터미널에서 여객선 시간표를 보던 나는 조금 놀랐다. 두둥실 호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다. 내가 처음 충무항에 닿았을 때 나를 제일 기쁘게 했던 것은 선창에서 만난 두둥실이라는 이름을 지닌 배 한 척이었다. 배의 이름이 두둥실이라니. 마음에 두둥실 흰 구름이 일었다. 나는 언젠가 꼭 그 배를 타고 한려수도를 지나리라 생각했고 그 생각은 충무를 네 번쯤 찾은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했다. 그런데 여객선 시간표에 두둥실호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조금 낯선 두리둥실호의 이름이 보였다. 두둥실호는 어디 갔느냐는 내 질문에 여직원은 방긋 웃더니 두둥실호는 지금 여수에 갔고 두리둥실호는 두둥실호와 전혀 다른 배라고 일러주었다. 언젠가 두둥실호를 타리라는 내 꿈 하나는 여전히 유효하게 되었다. 나는 안심하며 빗속으로 걸어 나왔다. 살이 세 개쯤 꺾인 우산 위에 부딪치는 빗소리가 포근했다. (264-265쪽)


- 당신, 지나간 시절들은 아름다웠는지요. 꿈과 그리움의 시간들이 단풍빛으로 화사하게 물들었는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진실한 마음으로 오래오래 포옹할 수 있었는지요. 꾸중 듣지 않고 회사에서 윗자리로 곧잘 승진했는지요. 한 3년 고물차를 끌고 다니다 새로 마음에 드는 스포츠카를 마련했는지요. 굶지 않고 병들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냈는지요.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는지요. 자신의 거짓말이 다른 사람에게 깊은 상처가 되고 폭력이 되지는 않았는지요. 십 원이나 백 원 때문에, 먼저 주차할 공간 하나 때문에 내 앞의 사람과 싸우지는 않았는지요. 혹여, 꿈이나 그리움이 어디 있는지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저 벌레처럼 돈 모으는 일에만 집착하지는 않았는지요……. 파도소리가 싱싱합니다. 지나간 시간들, 따뜻했으나 쓰라린 숨결들, 그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울지 마세요. 새로운 시간들은 늘 우리 앞에 펼쳐지는 법이니까요. 조천, 신비한 하늘의 아침처럼 말이지요. 당신, 내 앞에 내 옆에, 내 뒤에 무수히 서있는 허물 많고 그리움 참 많은 당신, 힘내세요. 저기 새로운 시간들의 파도소리가 들리지 않으세요? (242-243쪽)




*목소리 리뷰*  https://www.podty.me/episode/15532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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