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식을 기대하며 7시 반쯤 일어나 씻고 짐을 챙겨 놓고 8시 좀 넘어 아래로 내려갔다. 요즘 간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조식이었다. 샐러드와 죽, 그리고 요거트와 과일을 먹었는데 딸은 바삭한 식빵만 버터 발라 세 개나 먹었다. 야채류나 과일도 먹으면 좋겠는데 아쉬웠다. 사려니를 통과할 생각에 배부르게 먹었는데 사려니에 도착하니 오늘 기상 악화로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데크 길만 갈 수 있게 되어 있어 그 길을 걸으며 딸과 사진을 찍었다. 데크에도 눈이 가득 있어 미끄러웠다. 딸이 사려니 숲을 마음에 들어 해서 너무 행복했다. 걸으면 열이 날 거라 생각하고 외투도 걸치지 않은 채 가디건 차림이어서 추워서 사진만 찍고 나왔다.
차를 빼려고 했는데 얼음에 바퀴가 붙은 것인지 꼼짝을 안 했다. 너무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부부처럼 보이는 분들이 차를 밀어야 할 것 같다고 하시며 앞쪽에 서셨다. 나만 다시 차로 올라 후진을 하면서 딸까지 셋이 미는데도 안 움직이다가 갑자기 왼쪽으로 휙 미끄러졌다. 다치실 뻔했는데 다행이었다. 다시 내려서 보니 오른쪽 바퀴가 검은 턱에 끼어 있었다. 그래서 핸들을 돌리며 앞으로 한 번 갔다가 뒤로 뺐다. 미끄러지다가 밀어주신 덕에 바퀴가 겨우 빠져나왔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가방에 있던 어제 딴 귤이라도 드릴까 하다 기회를 놓쳤다. 큰 소리로 너무나 감사하다고 여러 번 말씀드렸다. 우리도 앞으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힘써 돕기로 딸과 함께 다짐했다.
원래 사려니를 통과하고 점심을 먹으려고 했던 곳에서 그냥 차를 마시기로 했다. 다시 애월 쪽으로 가는 길이라 호텔과 반대 방향이어서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갈까도 생각했는데 도착해서 보니 너무 예쁜 건물이어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장도 딸린 독특한 공간이었다. 미리 찾아볼 때 나무가 많아 숲 속인가 싶었는데 키 큰 나무가 심긴 도로변 카페였다. 얼마 전에 알게 된 뱅쇼라는 음료가 있어서 시켜 보았다. 달달했다. 수영장에서 딸 사진을 찍었다.
오후에는 서귀포로 넘어왔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전날 딴 대형 귤을 까먹고 있는데 딸이 배가 몹시 고프다며 점심을 먹자고 했다. 귤을 먹지 말 걸. 3시쯤 딸이 찾은 라멘 집에 갔다. 조식을 많이 먹고 카페에서 케이크도 먹고 귤까지 먹어 배가 불렀지만 라멘정도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작고 예쁜 매장에 들어가니 일본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 두 종류인 라멘을 하나씩 시키고 무알콜 맥주가 있어 그것도 시켰다. 한 모금 먹는 순간 맛이 너무 좋아서 배 부르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열심히 먹었다. 반찬으로 나온 고추냉이 들어간 무절임이 너무 맛있어 집에서 해 먹어 보고 싶었다. 무에 소금, 설탕, 식초, 고추냉이, 그리고 물을 넣은 것 같았다.
바로 동백숲으로 향했다. 지난주에 온 눈과 강풍으로 동백이 많이 시들어 있었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바글바글했다. 핫 플레이스인가 보다. 사진이 잘 나오긴 했다. 춥지 않을 줄 알고 둘 다 외투를 벗고 갔더니 싸늘하게 추워서 딸 사진만 얼른 찍고 나왔다. 배가 너무 불러 카페에는 가지 못했다. 동백숲 입장료는 3000원이었다.
바로 호텔로 와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딸이 혼자만의 제주를 느껴보고 싶다고 해서 나는 이중섭 미술관과 이중섭 거리를 거쳐 올레 시장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딸의 전화가 왔다. 엄마 따라갈 걸 그랬다며 길을 걷다가 혼자 음식점이나 작은 카페 가기도 멋쩍어 그냥 호텔에 들어가 씻는다고 했다. 이중섭 미술관은 거의 서귀포 올 때마다 들르는 곳인데 딸과 함께 오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나와는 다른 취향을 가진 딸을 존중하며 늦은 저녁은 올레길 근처에 있는 곳에서 먹기로 했다.
호텔에서 잠시 쉬다가 야경이 예쁘다는 세연교에 갔다. 차 세울 곳이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차고 높은 경차라 주차 타워에 넣지 못하고 5분 거리 무료 주차장에 댄 터라 택시를 타고 갔다. 세연교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고 많이 고즈넉했다. 야경보다는 해질 무렵이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가서 보니 차 댈 곳도 많았다. 사람도 많이 없어서 사진을 계속 찍다가 딸이 추운지 바로 들어가자고 해서 택시를 다시 불렀는데 아까 그분이 오셨다. 저녁을 간단히 먹고 호텔로 와 밤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두 시간이나 왕수다를 떨었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