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거인 것 같아. 노인성 우울증…"
시어머니는 부쩍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언제부터였나 따져보니, 남편을 여읜 후 슬하의 세 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혼자 지내신 지 6-7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그 당시 집 근처 문화센터에 즐겁게 다니시며 왕성한 활동을 하실 뿐 아니라 살림의 여왕 다운 면모를 잃지 않고 계셨기에 그리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댁에서 멀리 떨어져 살며 첫 육아에 절절매던 때라 아직 노인문제는 나와 무관한 일로 제쳐두고 있었고 심지어 그냥 시어머니의 어리광 정도로 치부하며 한 귀로 흘려듣고 말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냥 넘겨버리기엔 석연찮은 일도 있었다.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데 2008년 봄, 해외생활로 오래 만나지 못했던 아주버님 가족과 지방에서 살던 우리 가족은 서울의 한 공원에서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조카가 13살, 우리 큰 애가 8살, 작은 애가 6살일 때니 볼거리도 놀거리도 필요했고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미술전시회도 볼 수 있는 곳이어서 간단히 분식으로 점심을 먹고 부지런히 전시회도 둘러본 후 저녁을 근사하게 먹기로 했다. 이 모든 계획을 말씀드렸건만 돗자리를 깔고 근처 분식점에서 사 온 음식을 펼치자 표정이 안 좋아지시더니 "난 지저분하게 남이 싼 김밥은 먹기 싫다. 모처럼 만나서 이런 비위생적인 음식을 먹게 하니?' 하시며 토라져서 혼자 집으로 돌아가버리셨다.
말려도 소용없었다.
헐....
그때도 이 말이 유행했다면 입을 쩍 벌리고 한참을 헐~~~ 하고 있었을게다.
아이들에게 할머니의 괴팍한 행동을 설명할 수 없어 난처했던 기막힌 소풍.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시던 그 긴 시간 동안 어머니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 일이 있은 다음 해에 우리 집은 어머니댁과 차로 40분 거리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 좋아하시기도 했지만 예의 그 어리광이 더 심해지는 것 같더니 어머니는 특별한 이유 없이 식욕이 떨어지고 급기야 드시는 대로 토하기까지 해서 링거에 의존해야 하는 날이 점점 늘어갔다. 병원에서 위내시경 검사를 해보더니 위는 건강한데 약간의 역류성 식도염이 있다며 약 잘 드시고 예민하게 신경 쓰지 마시라고 했다. 그렇게 처방받은 약을 드시며 탈이 나는 빈도수는 적어졌지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같은 증상이 나타나곤 해서 급하게 달려가야 했다.
어머니댁에 가보면 거실 커튼을 쳐 둔 상태로 어두침침하게 지내고 계셨는데 커튼을 열어젖히고 환기를 시키려 하면 방금 환기를 끝냈다, 감기 기운이 있으니 문을 열지 말라는 등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거나 상황 무관 하게 고집을 부리기도 하셨다. 주방에는 빈 판피린 병이 쌓이고 있었고 아직 뜯지 않은 판피린도 한 두 박스는 있었다. 판피린은 컨디션이 안 좋다 싶으면 무조건 드셨는데 그 당시는 거의 중독이었다. 나중에 보니 판피린 과다복용의 후유증 중에 역류성 식도염이 있었다.
그즈음 가스불을 끄지 않고 외출하는 바람에 냄비가 탄 일이나 가스밸브를 잠겄는지 기억이 안 나 집을 나서다 말고 다시 들어가 확인했노라며 '나도 갈 때가 됐나 보다'라는 상투어가 등장하는 전화도 받기 시작했다.
그해 겨울, 당신이 자꾸 깜빡깜빡 잊어버리는 것이 걱정이 되신다며 직접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으셨는데 ‘경도인지장애'라는 진단이었다. 치매가 아니라 노인이 되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노화 현상이라며 오히려 안심하셨고 우리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럼 그렇지, 우리 어머니가 치매에 걸릴 리가 없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리고 2년 후, 어머니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셨다.
그때 정신과 검진을 받았다면 어땠을까.. 적절한 심리치료로 치매를 훨씬 늦출 수 있지는 않았을까?
노인성 질병에 관한 이해가 있었더라면 좀 더 세심하게 살필 수 있지 않았을까?
노인성 우울증이 치매의 원인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우울증이 치매의 위험요인임은 분명해 보이고 우울증을 방치했다는 자책감은 지금까지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물론 문화센터에서 수채화를 즐겁게 배우고 계셨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나가시고 종일 그림만 그리셨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단조로운 그 생활이 어머니 성에 차지 않았겠구나 싶다.
큰 아이가 돌 지날 무렵 물어뜯는 버릇이 생겼다. 욕구불만이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도대체 뭐가 채워지지 않는지 알 수가 없고 아이의 버릇은 고쳐지지 않아 괴롭기만 했다. 남편 직장일로 해외에 살 때라 기후 문제나 안전문제 때문에 주로 실내에서만 지낼 수밖에 없었는데 한참 자란 후에야 그 시기에는 바깥에서 충분히 뛰어놀게 해줬어야 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의 우울감도 비슷한 문제가 아닐까?
내가 아는 지식과 경험 밖에서 그저 막막하기만 하던 육아의 어려운 문제가 이제는 치매 간병이라는 문제로 살짝 비틀려 출제된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