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병이 생긴 후에도 꽤 오랜 기간 기록하는 습관을 유지하셨다. 쓰던 수첩을 찾지 못해 새 수첩이 몇 개 더 늘어나긴 했어도 간단히 일과를 기록한다든가 친척들 주소록이나 은행계좌번호 , 주민등록번호 따위의 개인정보를 소중히 여기며 꼭 메모해 두셨다.
한 푼이라도 절약하려 가계부를 쓰셨고 필요한 목록을 미리 메모해서 장 보러 가시던 습관도 여전했다.
'쿠킹호일, 비닐장갑, 쌀, 마늘, 사과, 포도주스, 쓰레기 종량제 봉투..'
언제 써 둔 메모인지 알 수 없는 쇼핑 리스트이다.
메모해 둔대로 꼼꼼히 구매를 완료하고 나서도 메모지를 없애지 않아 산 물건을 또 사고 또 사고..
부엌 다용도실 창고는 흡사 슈퍼마켓 한 코너처럼 일회용품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왜 이렇게 많은지 여쭤보면
“얼마 전에 요 아래 가게가 점포 정리하느라 싸게 팔길래 여러 개 사뒀어.”
“친구가 집에 놀러 오면서 사 왔어. “
“이 집 이사 올 때 그 전 주인이 놓고 간 거야. 정신 나간 여편네지 뭐야? 호호호"
그때그때 다양하고 그럴싸한, 때로는 황당한 대답을 하셨고 이유야 뭐가 됐든 그 덕에 한동안 일회용품은 어머니 댁에서 마음껏 가져다 쓸 수 있었다.^^;
베란다 마트 모습. 실제 풍경 묘사
그런데 문제는 신선식품이다.
냉장고에는 같은 음식들이 시간 순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란 듯이 쌓여 있었고 다 드시기도 전에 또 쌀을 주문하는 바람에 졸지에 묵은쌀이 되어버린 쌀포대마다 쌀벌레들이... 으~~~ 그놈들을 소탕하느라 온갖 방법을 연구해야 했다. 잠깐 연구결과를 보고하자면 Best 1위는 가래떡 뽑아서 두루 나눠 먹기이고 2위는 냉동실에 얼려서 쌀벌레 동사시킨 후 잘 씻어내고 밥 지어먹기이다. 나머지 여러 방법은 비추!
용맹했던 '습관 세포'의 생명도 2년여 시간이 흐르는 사이 서서히 소멸해 갔고 어느 날부터 더 이상 어머니의 메모를 볼 수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