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다니실 때는 물론이고 결혼 후 전업주부가 되어서도 틈틈이 아이들 공부를 봐주거나 전통매듭을 가르치시며 번 돈을 알뜰히 모으셨다고 한다. 어느 은행에 저축하면 예금이자가 많은지 꿰뚫고 계셨고 여러 개의 통장을 관리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 지 힘주어 말씀하시곤 했다. 주거래은행 VIP 고객으로 받은 사은품도 자랑스럽게 나누어주셨는데 주거래은행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새겨진 앞치마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치매는 어머니에게서 그 큰 기쁨을 앗아가 버렸다.
치매진단을 받은 지 3년 정도 되던 때부터인 것 같다.
어머니는 예금 만기일자를 혼동하거나 통장 잔액이 얼마인지 잊어버리기도 하시고 통장이나 도장을 깊이 숨겨둬서 찾지를 못하게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은행 나들이를 하셨다. 사실 덜렁 대장인 나에겐 흔한 일들인데 꼼꼼하고 정확한 어머니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 그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목소리에는 슬픔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어찌할지 모르시겠다니.. 문제 해결 능력도 점점 없어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루는 함께 은행에 가서 통장을 새로 발급받게 되었는데 급기야 은행 직원이 화를 냈다.
“아니 며칠 전에 새로 발급해드렸는데 또 잃어버리시면 어떡해요!”
“미안해요 내가 요즘 깜빡깜빡해서..”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움츠러드는 어머니의 모습이 짠했다. 새로 이사한 동네의 은행이라 어머니를 알아볼 리 없는 직원에게 서운한 마음을 품기도 어렵다. 게다가 새 통장 대신 잃어버렸던 통장(이미 말소되었는데 어느 날 찾게 된 것)을 갖고 오시기 일쑤이니 은행 직원으로서는 얼마나 괴로울까!
아직은 본인의 주민등록번호나 전화번호, 주소를 직접 말하고 쓰실 수 있는 정도의 병세라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지만 오히려 보이스피싱 같은 사기를 당할 빌미가 될 수도 있어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내가 통장관리를 맡아드리면 어떻겠냐고 어머니께 여쭈어보았더니 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내 통장관리를 왜 네가?'라고 말씀하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시는데 말문이 막혔다.
'그러게요. 제가 괜한 말씀을 드렸네요.'라고 마음속으로 대답했는데 어머니는 들으셨을까.. 잠시 후 어머니는
"아니야 내가 할 수 있어!." 사뭇 결의에 찬 목소리로 대답하셨다.
어머니의 대답을 믿고 가만히 있기엔 아무래도 불안해서 궁리 끝에 은행에 따로 찾아가 사정을 말씀드리기로 했다. 그동안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하다고 하니 화를 냈던 직원도 충분히 양해해주셔서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다음에 또 오시면 전화해 달라고 내 연락처를 알려드렸다. 통장 재발급건뿐 아니라 큰돈을 찾거나 송금을 원하시더라도 먼저 전화를 해주십사 부탁드렸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전화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기 00 은행인데 000 어머니가 통장 분실 건으로 오셨어요. 바꿔 드릴게요”
“어머니 통장 제가 갖고 있어요. 지난번에 은행 같이 갔다가 제 가방에 넣어왔지 뭐예요? 급하지 않으시면 주말에 갖다 드릴게요.”
“호호호 난 또 잃어버렸나 하고~그럼 그럼 급할 것 없지~”
마지막에 새로 발급한 통장은 내가 관리하고 주말 방문 때 ATM기기에서 통장정리와 약간의 현금을 찾아 드리는 걸로 은행에도 폐를 덜 끼치고 어머니에게도 금전문제에 관한 한 어느 정도 안전망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