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큼지막한 퍼즐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를 테면 이런 것이다.
인생 설계부 직원으로 변신한 신이 은색빛의 말끔한 스카트 정장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난다. 손에는 300페이지 정도 되는 공문서가 들려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00년 00월 00일에 탄생 예정이시죠? 탄생 전에 경험하실 인생에 대해 현재 단계에서 어느 정도 계획해 놓으셔야 하는 부분들이 있거든요.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공문서의 첫 장을 펼치자 질문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여러 선택항목 중에 고를 수 있는 질문도 있고, 주관식으로 답해야 하는 질문도 있다. 어떤 질문은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해야 한다.
"어디 보자... 1번 질문은 부모에 관한 것인데, 고객님께서는 현재 어느 부모로부터 탄생할지는 이미 정해 놓으신 상태시네요. 그럼 2번부터 답을 체크해 주시면 되겠어요."
직원분이 건네준 펜으로 답을 해 나가기 시작한다. '어느 성별로 태어나시겠습니까?' 질문에는 '여자' 칸에 체크. '성인이 되었을 때 키는 몇 cm 로 하시겠습니까?' 질문에는 165 라고 쓴다.
질문 하나하나에 신중하게 답변을 하면서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어느덧 30페이지에 다다른다. 이 페이지에서부터는 건강에 관한 질문들이 열거되어 있다. 사는 중에 감기는 몇 번 걸릴 것인지, 얼마나 심한 감기를 앓을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도 구체적인 답변들을 적는다. 감기 외에는 질병에 대해 일괄적으로 '경험하지 않음' 이라고 표기하려 하는 순간, 직원분의 눈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며 나를 살피고는 뽀얀 생크림처럼 스윗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음음 인생을 지나는 내내 병이 하나도 없는 게 꼭 좋은 건 아닌 것 같더라구요. 변화와 성숙엔 병만한 것도 드물죠."
좋고 싫음에 대한 감각이 없는 순수한 영혼인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그것도 그렇겠네'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 40살 전후에 초기 유방암을 경험하는 걸로 할게요."
"오 아주 좋은 선택 같아요. 수술은 몇 번을 경험하시겠어요?"
"변화와 성숙에 도움이 된다고 하셨으니까, 세 번 정도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네. 그 질문에 3 이라고 쓰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종류의 영혼간의 합의가 있었던 건 아닐까.
나의 아스퍼거도 이런 합의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이렇게.
기나긴 질문 항목들에 대해 답변을 거의 마쳐가던 즈음, 직원분이 한가지 제안을 한다.
"혹시 불확실한 느낌을 제대로 경험하고 싶진 않으세요? 혹시 그러시다면 약간의 아스퍼거(자폐의 일종)를 추천드려요. 아스퍼거는 늘 하던대로 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불확실한 상황들에 대해 크나큰 저항을 경험하게 된답니다."
"어머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험해 보고 싶어요. 그걸로 할게요."
이 합의 내용은 마지막장 맨 밑의 필수 동의 항목으로 끝맺는다.
** 이 모든 인생설계를 탄생 전에 완전히 망각하는 데에 동의한다.**
직원 분이 미소를 지으며 공적인 어조로 말한다.
"고객님, 이 항목은 탄생에 필요한 필수 동의 항목으로서, 이 항목에 동의하셔야만 탄생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이 칸에 체크하고 사인해 버려서 인생의 모든 일들이 불확실성 속에 일어나게 된 것 같다.
초기 유방암 진단을 받은 날부터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게 바로 이 불확실성이었다.
평화롭던 어느 날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어딘지 이상해서 유방 자가 검진을 해 보자 나왔던 검은 액체가 무엇 때문이었는지 불확실했고,
동네 유방외과 병원의 초음파 화면에서 처음 대면한 무서운 아우라의 덩어리가 무엇인지 불확실했고,
조직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불확실했고,
양성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서 수술을 통해 떼어낸 그 덩어리가 암이었다는 진단을 받게 될 줄 몰랐고,
그 후로 반 년마다 받았던 정기 검진의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올지 매번 불확실했다.
아스퍼거인 나는 이 불확실성이 매우 불편하다.
나는 대부분의 방면에서 내가 좋아하는 특정한 방식을 택한 후 그대로 반복하는 걸 편안해 한다. 반찬이 네 가지가 있다면, 그 네 가지 반찬으로 내가 좋아하는 특정한 조합을 그 종류와 양까지 고려해 구체적으로 만들어서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 조합만을 만들기를 반복한다. 잠자리에 들면 먼저 호흡을 느낀 후 발끝부터 머리까지 차례대로 의식해서 긴장을 푸는 똑같은 의식을 매일 밤 반복하며 잠에 든다. 남편과 어딘가로 가기 위해 차에 탈 때마다 시트를 따뜻하게 데우고, 핸드폰을 차에 연결하고 나서, 안전벨트를 메는 순서를 몇 년째 반복 중이다. 무엇이든 정해져 있고 예측 가능할 때 마음이 놓이고 편안하다. 그러나 유방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겨나고 없어질지 모르니 미리 정해놓고 대응하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했다.
오늘 나는 종합병원의 유방외과 진료실에 가서 앉아 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입을 여시기 전에 컴퓨터 화면으로 나의 수술에 대한 검사 결과를 살펴보셨던 잠깐의 시간이 믿을 수 없이 길게 느껴졌던 건, 견딜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재발한 암 조직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지만, 수술 부위 옆에서 발견된 '이상한 세포'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또다시 불확실했다. 만약 암이라면 재수술을 받아야 하고, 재수술을 받게 된다면 지난번 수술보다 조금 더 큰 부위를 떼어내야 한다고 했었다.
"지난 번 말씀드렸던 점과 관련해서 검사 결과를 보았습니다만..."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를 감싸고 있는 불확실성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네. 암이네요. 악성입니다."
이어서 재수술의 날짜가 정해졌다. 불확실성이 암이라는 확실한 사실로 변하면서 나의 유방암의 세 번째 수술이 확정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오늘 이후로도 반 년마다 정기 검진을 받으며 불확실성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불확실한 상황들에 계속 놓여지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불확실성에 대해 울며 겨자먹기로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끊임없는 불확실성 속에 나를 놓아두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삶을 누리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도 든다. 그래서 기도하게 된다.
신이시여, 지금의 나는 당신의 뜻을 온전히 알 수는 없지만, 나의 삶을 당신이 당신 뜻대로 완벽하게 창조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신께서 창조한 나의 삶의 여정에서 당신의 뜻과 당신의 완벽함을 내가 조금씩 더 알아갈 수 있도록 매일같이 나와 소통해 주세요. 부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