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암 수술 전날의 할일 리스트

by 청아

내일이면 다시 수술이다. 이번에는 절차가 간소화되어, 입원없이 바로 수술실로 향한다.


덕분에 수술 받은 후 하룻밤만 입원실에서 보내게 되었다. 지난 번 수술로 입원했을 때는 내 옆에서 이틀 내내 긴장해야 했던 남편이 밤에도 거의 잠에 들지 못했다. 조그마한 보호자 침대에 누운 남편은 발목부터 공중에 떠 있었고, 새우처럼 웅크리자 척추가 침대 밖으로 삐져나왔다.


퇴원날, 정작 수술받았던 나보다도 더 수척해진 남편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하룻밤만 병원에서 보내면 되니까 남편이 지난번만큼 지치지는 않을 것 같다. 연이어 수술 받게 되면 이런 좋은 점도 있구나 싶다.


전신 마취된 상태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고 그로부터 차근차근 회복하는 경험을 해 보았으니, 내가 다시 한 번 수술을 받게 될 때는 지난번보다 한결 평안하고 씩씩하게 이 과정을 지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나의 머리와 가슴은 서로와 스텝을 맞출 의사가 없다. 평안할 거라는 예상은 머리에서 했을 뿐, 가슴으로는 한 발짝도 내려오지 않은 듯 하다.


아침 식사 후 커피 한잔을 하고 나면 어김없이 화장실에 가자고 보채는 나의 장이 어제 하루 종일 아무런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을 때는 어쩌다 그런 날도 있지 하고 생각했다. 오늘, 커피를 마신 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시그널이 없자 그제야 비로소 눈치를 챘다.

아아 내가 또 쫄았구나...


안 아프던 머리도 왠지 좀 아픈 것 같고, 별로 한 것도 없이 피곤했다. 햇빛이 살갑게 비춰오고 거리에는 반팔티가 넘쳐나는 사랑스런 봄날, 나는 혼자 추워서 덜덜 떨고 있었다. 이불 속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려도 추위는 누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추운 게 아니라 마음이 추운 거였다.


나의 가슴이 머리에게 물었다.

"나... 떨고 있니..."



며칠 전에 처음 수술을 했을 때는 처음 경험하는 상황들 속에서 나와 회복 상황을 살펴가며 대응해야 했다. 한 번 해보았으니, 이번에는 잘 준비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후 약 일주일 정도는 전신 마취와 수술 부위의 회복에만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수술 받으러 가기 전에 집안일을 어느 정도 당겨서 해놓기로 했다. 그래서 노트에다가 수술 전에 할 일들을 적었다.


안방 화장실과 거실 화장실 청소해 놓기.
재활용 쓰레기 버려놓기.
음식 쓰레기 버려놓기.
코스트코 장 봐놓기.
......
......


적다보니 어느새 A4 크기의 노트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우는 아주아주 긴 리스트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리스트에 적힌 일들을 향해 진격을 했다. 일단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작동시킨 다음, 차를 타고 나가서 적지 않은 곳들에 들러 볼 일을 보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빨래를 널고 청소기를 돌렸다. 다 마친 일은 빨간 펜으로 그었다.


나는 오후 세 시도 안 되어 지쳐서 자리에 누워 버렸다. 아직도 그어지지 않은 아이템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수술 후에 회복을 잘 해보겠다고 이렇게 준비를 하다가 수술 전에 몸살이 나버릴 것 같았다.


그 때 깨달았다. 나 스스로는 앞으로의 상황에 대비하는 거라고 생각했던 이 기나긴 리스트가 사실은 무서움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한 눈가림이었던 것이다. 한 번은 멋모르고 했는데, 그게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으면서도, 그렇다고 또다시 하기는 싫었나보다. 나는 마음 속에서 어린 아이처럼 떼를 쓰고 있었다. 싫어 싫어 싫어... 하고.


마음아 너가 싫구나.. 무섭구나.. 나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쓰다듬어 주었다. 마음에게 싫어하지 말라고도 두려워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마음아 너가 그 어떤 마음으로 있든지, 너가 있는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해줄게. 외면하지 않을게. 바꿀려고 하지 않을게.


나의 마음을 사랑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내 뜻대로 바꾸고 싶은 욕구를 내려놓는 데에는 어떤 의미에서 용기가 필요한 것 같았다.


그러자 오늘 끝마치지 않으면 내가 수술 후에 회복을 잘 할 수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던 리스트가 의미 없이 느껴졌다. 여기에 씌여진 일들 중 대부분이 한 주 정도 안 한다고 큰 일 나는 것들도 아니었고, 만약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남편이 할 수도 있었다.


리스트는 그대로 였는데, 리스트를 만든 나의 마음이 변해 있었다. 무서움에 떨던 나의 마음이 어느새 내 품 안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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