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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21. 2023

엄마. 완벽하지 않아도 찬란하게 빛났던 나의 사람.

멸추김밥과 황태국

엄마는 나에게 있어서 온 세상이었다.


엄마는,

서로 모든 것을 털어놓는 나의 베스트프렌드였고,

내 마음 속 등불이었고,

나의 롤모델이었고,

내가 언제고 지혜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나의 안식처였고,

온 세상이 나에게 등돌리고 나를 비난한다 해도 변함없이 내 옆에 서서 같이 화살을 맞아줄 사람이었다.


엄마는 밝은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엄마가 웃으면 온 집안이 환해졌다. 배에서부터 올라오던 엄마 특유의 웃음 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엄마는 무엇을 하든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하지?" 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엄마가 했던 것들을 보면 항상 무언가 남달랐다.


엄마는 아름다움을 사랑했다. 자연 속 온갖 색들의 어우러짐, 옷들의 색감과 라인들, 사람마다 가진 얼굴의 아름다움들,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의 어여쁨.. 엄마의 마음 속에는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과 기쁨이 넘쳤다.


엄마에게는 놀라운 지혜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엄마와 상의하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싶은 지혜들을 엄마는 나에게 친절하게 말해주곤 했다. 


사람들이 흔히들 동의하는 부분들에 있어서, 엄마는 생각없이 따라가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맞다고 여기는 대로 했다.

그런 멋진 대담함이 있었다.

내가 엄마에게 남편을 데려갔을 때도 적지 않은 나이차이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면서, 나를 사랑한다는 남편의 진심어린 고백과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가겠다는 남편의 방향성을 듣고 대번에 남편을 사위로 기쁘게 맞아들였다.


엄마는 평생 나와 동생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퍼부으며 살아갔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이모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니네 엄마처럼 자식 사랑하는 엄마가 어디가 있겄냐.."

엄마는 자식을 위하는 일에는 불도저 같은 힘이 솟아올랐다.


엄마는 사랑과 연민으로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것도 좋아했다. 상하이에서 엄마가 다니던 교회에 자기 고향을 떠나 상하이에 와서 직장에 다니는 조선족 청년들이 있었다. 엄마는 고등어 조림과 토마토 샐러드를 만들어 교회로 가져가서 집이 고픈 청년들에게 집밥을 선물해 주었다.

주변에 몸살 기운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의사인 아빠와 함께 가서 그 사람에게 링겔주사를 놓아주기도 하셨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사랑하고 동경했다.

처음 만났을 때 남편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도 남편이 엄마와 너무나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요즘에도 가끔씩 남편이 소름끼칠 정도로 엄마와 똑같은 말을 할 때가 있다.

'방금 이거 엄마였나..?'


나는 나의 엄마가 거의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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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누군가가 내 마음 속의 조명 스위치를 탁 켠듯,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엄마의 전체적인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동안 엄마를 내 마음에서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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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애정결핍이 있었다... 놀랍게도.

자식에게 그토록 많은 것들을 주던 사람에게 애정 결핍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엄마는 9남매 중 네 번째 아이로 성장했다. 외할아버지는 자식 사랑이 유별나셨다고 하지만 주로 집 밖에서 일 하는 데에 시간을 보내셔야 했을 테고, 외할머니는 상처가 많으셨던 데다 아들들을 많이 편애하셨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동생들을 업어야 했고, 외할머니가 시켰던 집안일들을 하느라 손이 거칠어졌다. 엄마가 대학교에 갔을 때 주변 친구들은 손이 고운데 자신은 손이 너무 투박해서 창피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이 있었던 엄마는 나를 곱게 키우려고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집안일은 일절 시키지 않고 자신이 다 했다.


엄마는 자신이 못 받았던 걸 나에게는 어떻게 줄 수 있었을까.


애정을 듬뿍 받고 자라지 못했던 엄마는 자신을 사랑하기가 참 어려웠겠구나..

엄마가 자신을 배려해 달라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 꾹 참고 감내하며 살았었다는 걸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깨달았다. 꾹 참았던 말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종종 분노가 되어 폭발하곤 했다.

엄마가 자신을 사랑하는 행동을 하거나 자신을 위한 시간을 보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것도 그제야 깨달았다. 힘도 시간도 모두 가족에게 퍼부을 뿐이었다. 엄마는 고갈되어 갔다.


엄마는 딸인 나에게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게 어떤 거라는 걸 보여줄 수가 없었다. 엄마 자신도 몰랐으니까.


엄마가 나이가 들어서도 외할머니의 사랑을 원했다는 걸 나는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

엄마의 사소한 행동들이 원래는 외할머니의 모습이라는 걸 알았을 때 굉장히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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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었다.

이 사실도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 기억 속 엄마는 위풍당당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위풍당당은 낮은 자존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의 태세였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사과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한 번도 "엄마가 미안해." 라는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함께 살면서 미안할 일이 없을 수는 없는데, 엄마는 미안해할 만한 일이 생기면 오히려 더 괘씸해 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가 너한테 해 준게 얼만큼인데 거기다 미안해까지 해야 되냐 하는 식이었던 것 같다.


엄마가 교회에서 진행하는 <어머니 학교>를 수강한 적이 있었다.

그 후 나도 가서 그 프로그램을 들어보니,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어떻게 자식에게 전해지는지, 체벌에 관한 이야기 등등 와닿는 내용들이 많았다. 엄마가 원하기만 했다면 나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대화를 해줄 수가 있었다. 나에게 미안하다고 해줄 수 있었다.

아마도 엄마는 용기가 없었나보다.


엄마는 또, 자기 말대로 안 하면 화를 내곤 했다.

엄마가 선풍기는 다리에 쬐는 게 오히려 더 시원하다 했는데, 내가 얼굴에 쬐면 짜증을 냈다.

엄마가 김치찌개를 밥에 비벼 먹으라 했는데, 내가 밥 따로 찌개 따로 먹으면 싫어했다.


문제는.. 그게 돈에 관련해서도 그랬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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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낮은 자존감은 쉽사리 집착과 고집의 형태가 되어 나타나곤 했다.

엄마는 사기꾼들의 최고의 사냥감이었다.


사기꾼들은 엄마 내면의 불안함을 금세 냄새맡고 다가왔다.

엄마는 사기꾼들의 말에 쉽게 현혹이 되었고, 일단 설득이 되고 나면 강경하게 사기꾼들 편을 들었다.


아빠가 아니라고 하면 혼자 가서 사기를 당했고,

내가 옆에서 그거 아니라고 하면 나에게 분노했다.


사기라는 게 드러나고 목돈을 잃고 나면, 자신이 그랬던 데에 스스로 죄책감은 가졌지만 미안함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가족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에는 엄마 자신이 너무 아팠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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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모습들 중 많은 부분을 나도 가지고 있다.


"넌 이토록 사랑받고 사는데 왜 이렇게 자존감이 없니..."

라고 했던 엄마의 안타까운 의문에 대해서 이제 그 답을 얻었다.

엄마에게 받은 것보다 엄마의 모습 자체가 나의 안에 남는 것이다.


엄마에게 원망이 없다.

엄마가 나에게 한 그 모든 것들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 그 이상이었다는 걸 안다.


엄마와 함께했던 모든 대화들과 경험들과 웃음들과 눈물들에 감사한다.

나의 엄마는 약점들과 아픔들을 품고도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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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멸추김밥과 황태국을 만들어 먹었다.

맛있긴 했는데, 청량고추가 어중간하게 들어가서 좀 아쉬웠다.

다음에 만들 땐 팍! 맵고, 단짠도 좀 더 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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