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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20. 2023

최악의 선생님과 최고의 선생님께. 감사합니다.. 짠!

배추전에 막걸리, 그리고 황태된장국

"이렇게 커서 뭐가 될래? 과외 선생이나 될래?"

내가 공부에 소홀해진다 싶을 때마다 엄마가 나를 혼내면서 내뱉던 말이었다.  

그리고 이십년 후 나는 과외선생이 되었다.

말은 정말 씨가 되나보다.


상하이에서 부모님을 떠나보낸 후 우리 부부는 아무런 계획도 없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도로 이사했다. 부모님과의 아픈 이별을 겪었던 나는 힐링이 절실했는데, 힐링을 하기에는 제주도가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일년 정도 둘이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제주도의 가슴 저미는 하늘의 아름다움과 카페들의 운치를 마음껏 즐기고 나서 생각해 보았다. 지금처럼 최대한 많은 자유시간을 누리면서도 한편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과외가 최선이었다.


그 때쯤 우연히 알게 된 지인 분의 자녀가 제주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일주일에 세 번 그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나의 과외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 중국어, 수학을 가르치다가, 남편이 관찰해 보고 나는 수학만 가르치는 게 가장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는 방법같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나는 제주 국제학교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과외선생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게 과외를 받는 학생들 수가 점차 늘어났다. 과외수업을 시작한 지 이삼년이 지난 후에는 학생들이 하교한 후 과외를 시작하는 4시부터 시작해서 밤 10시가 넘는 시간까지 수업 예약이 꽉 찼다. 그것도 모자라서 나에게 수업을 받고 싶어서 웨이팅을 걸어놓는 학부모들이 몇 십명이나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면서 수업을 했지만, 나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많아지고부터는 내 집에 수업을 위한 방을 만들어 놓고 그 곳에서 수업을 진행했다. 그러자 수업의 질이 더욱 좋아졌다. 내 집에서 일을 하니 이집 저집 옮겨다닐 때보다 체력소모가 적었고, 나의 심신 상태를 관리하기도 보다 용이했다.

남편이 학부모와의 상담을 포함한 행정 업무를 담당해서 나는 수업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사실 남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큰 도움이었는데, 학생이 버릇없게 행동하는 경우에 남편이 말없이 수업하는 방에 나타나기만 해도 기강이 잡혀서 수업의 맥이 끊기지 않았던 경우도 많았다.

아이들은 자신의 집에서 공부를 하다 보면 이런저런 것들에 신경을 많이 빼앗기기도 하고 긴장도 풀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의 집으로 찾아와서 공부를 하니 수업을 하는 모드로 전환이 되어서 그 부분도 수업의 효율 도움이 되는 것 같았다.



과외를 이렇게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건 나 자신이 수많은 과외를 경험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빠가 내 기억 속에 남겨준 유산 덕분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잘못된 방식으로 과외를 받다가 결국 수학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수학 과외 선생님 댁에 찾아가면 선생님은 나를 앉혀놓고 어려운 경시 문제집을 펴서는 A4용지에다 자신이 모든 문제를 다 풀면서 설명을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선생님이 문제를 푸는 모습을 지켜만 보았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으면 다 이해되는 것 같았고 나도 풀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숙제조차 없었기 때문에 나는 해야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선생님은 나를 특별하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원래 다른 두 명의 학생들과 수업을 받았는데, 이 선생님은 다른 두 명은 수학에 재능이 없다면서 나만을 가르치고 싶다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그 말에 엄마도 나도 기분이 우쭐해졌다.

선생님은 또 수업 시간에 푸는 그 문제집이 얼마나 어려운 건지를 수시로 이야기하면서 내가 (사실 선생님이 혼자 다 한 건데도) 굉장히 대단하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그 우쭐함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그 분에게 몇 년 동안이나 수업을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수업을 받는다고 해서 바로 성적이 떨어지는 게 아니었다. 성적이 계속 잘 나오니 아무도 문제의식을 갖지 않았다.

엄마는 공부를 해보았던 사람이 아니라서 이 수업이 나를 망치고 있는 건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알았더라면 이렇게 수학을 가르치는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과외 부문은 엄마가 관리하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아빠는 이 부분에 대해 모르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려운 문제집을 들고 다니는 게 기분이 좋았을 뿐이었다.


그 엉터리 수업의 부작용은 드러나는 데에 몇 년이 걸렸고, 문제가 수면에 드러났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  

나는 수능 시험에서 수학 점수를 그리 잘 받지 못했다. 중학교에 다니던 3년 내내 수학 시험에서 100점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이런 저런 수학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기도 했었던 점을 생각하면 참 초라한 성적이었다.



내가 경험한 선생님들 중 가장 좋았던 선생님을 꼽으라면 단연 아빠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나를 데리고 앉아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네 살 때쯤 아빠에게 처음 영어를 배웠다. 내가 어렸을 당시에는 영어 조기교육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아빠가 나에게 영어를 가르치겠다고 하셨을 때 주변에서는 너무 오버하는 거 아니냐는 시선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빠는 나를 품에 안고 영어 책들을 읽어주며 영어를 가르치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배우면 발음이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신 후에는 영어 선생님들을 오게 해서 나로 하여금 배우도록 했다.


사회 과목이나 과학 과목도 아빠가 가르쳐 주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사회 과목에 내가 사는 지방에 대한 내용이 나오자, 아빠는 교과서를 먼저 공부한 후, 나를 차에 태워서 지도를 내 손에 들리고 책에 나오는 곳들을 실제로 가보면서 그 곳들과 관련된 역사적 사회적 사실들을 설명해 주셨다. 조수석에서 아빠의 설명을 듣다가 잠이 들어 버렸지만...


아빠에게 배우는 역사는 참 재미있었다. 아빠는 내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내용을 미리 공부해 두셨다가 저녁 식사 때나 주말에 놀러갈 때 재미있게 설명해 주시곤 했다.



신기하게도 아빠에게 배우면 무엇을 배우든 시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도 않았고, 그와 관련한 응용 문제들도 쉽게 풀 수 있었다.

"아빠, 요즘 과학 과목에서 '전기'에 대해서 배우는데 좀 어려워요.."

중학교 때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아빠는 열심히 공부해서 다다음날 나에게 전기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다. 그 날 이후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기에 대해서 만큼은 어떤 문제도 수월하게 풀 수 있었다.


아빠는 특유의 가르치는 방식이 있었다. 나에게 중심 개념을 받아들이는 시간을 충분히 주셨던 게 포인트였던 것 같다. 나의 뇌가 그 개념을 찬찬히 소화할 시간을 주고 나서, 그 위로 부차적인 개념들이나 내용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아갔다. 그러다보니 배울 때는 아빠가 수업을 진행하는 속도가 느린 것처럼 느껴지곤 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오히려 빠른 시간 안에 전체 그림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아빠는 내가 이해를 잘 하든 못 하든 가르쳐 주시던 내내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게 그리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내가 다른 아이들을 가르쳐 보고서야 알게 되었다.


아빠는 무언가를 가르칠 때 대충하신 적이 없었다. 가르칠 내용을 책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되도록 반복해서 보고, 머리 속에서 씹고 또 씹으면서 자신이 먼저 완전히 이해한 후 가르치셨다.

그게 사랑이었다는 걸 나는 마흔이 다 되어서야 느낀다.

"아빠가 뭘 좀 가르쳐 주겠다고 하면 내 교과서들이 너무 보기싫게 너덜너덜 해진단 말이에욧!"

감사는 커녕 짜증만 잔뜩 냈다..



과외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경험한 수학 선생님과 정 반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을 관찰하다가 적당히 힌트는 주어도, 내가 직접 문제를 풀어주는 일은 없었다. 대신 학생의 현재 능력을 자세히 파악하고, 그 학생의 능력보다 조금만 더 어려운 문제들을 계속 주어서 스스로 해결해 보도록 했다.


어려워 보였던 문제들인데 자신의 힘으로 풀어내는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성취의 쾌감을 자꾸만 느끼게 되었고, 그러다 보면 전반적인 자존감마저 높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점점 어려운 문제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고, 문제를 풀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을 더 더 느끼고 싶어서 선생인 나에게 어려운 문제를 좀 내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잦았다. 나에게 배운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수학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나의 과외 수업은 어쩌면 돌아가신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었다. 아빠가 나에게 주셨던 사랑을 내가 학생들에게 그만큼 전해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아빠에게 배웠던 방식을 기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개념을 스스로 공부해 오게 해서 수업 시간에 나에게 설명하도록 했고, 그 개념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나서 탄탄하게 세운 개념의 기둥에다가 부차적인 가지들을 덧입혔다.

잘 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이유로 야단치지 않으려고 마음을 조절했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특히나, 마음이 주눅 들면 생각도 닫혀 버리기 때문이다.




남편과 나는 금요일 저녁이 되자 한 주를 열심히 살아간 데 대한 보상이 하고 싶어졌다.

배추전을 만들어서 한살림에서 산 찹쌀 막걸리와 곁들였다. 배추전 반죽에 마늘과 멸치 액젓과 새우젓을 좀 섞으니, 구웠을 때 배추의 고소한 단맛과 어우러져서, 한 입 먹으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배추전 한 입 먹고 남편과 막걸리 짠~


오늘의 짠은 나를 가르치셨던 수학 과외 선생님과 아빠, 내가 제주도에서 과외를 했었던 데에 밑거름이 되어주신 두 분께 바치고 싶었다.

감사합니다... 짠!



막걸리 한 병을 비우고 난 후 황태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먹었다.

황태 된장찌개가 고소함의 극치였는데, 거기에 밥의 달달함이 스며들자.. 맛의 감동이 우주에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아아




* 배추전 레시피는 유튜브 <성시경> 의 '[성시경 레시피] 무&배추전' 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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