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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17. 2023

좋아합니다. 의 기적

황태국 + 국수

잠옷을 입고 남편과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요즘 인기가 많은 드라마라 어떤가 궁금해서 보았는데 그야말로 유치뽕짝이었다. 남주는 필요 이상으로 멋진 척을 해댔고, 여주는 해맑고 씩씩한 캔디같은 모습으로 남주의 마음을 훔치는 스토리였다.

어머 너무 유치하잖아 하면서도, 오히려 그 유치함이 재미있어서 계속 보게 되는 신기한 마력을 가진 드라마였다.


모니터 앞에 거의 눕듯이 앉아서 과자를 씹어 먹으며 남편과 함께 껠껠 거리던 중이었다.


"누나는 ** 하는 거를 좋아하시잖아요."


예상치 못한 찰나에 어느 신인 조연의 어색한 대사가 쿵 하고 내 내면을 흔들었다. 눈물이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울기 직전 입 안에 넣었던 과자 쪼가리를 겨우 겨우 삼키면서 엉엉 울었다.



무기력에서 회복해 가는 과정은 어찌보면 굉장히 단계적이었고 많은 시간이 들었다.

일단, 내가 무기력하구나 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인정하는 것부터가 장님이 시력을 되찾는 것 같은 기적이었다.

나의 상태를 알고 나니, 이제는 내가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방향성을 정해야 했다. 변화 없이 계속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도 있었고, 에너지 넘치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나의 망설임 없이 전자를 택했다. 변화라는 거는 기본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건데, 나는 힘든 게 진짜 무조건 싫었다. 나 자신을 위해서조차 힘들기 싫었다. 그래서 그냥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싶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변화하지 않고 무기력하게 살아야 겠다는 선택을 했다고 해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거다. 살아가면서 하는 일들이 있는데, 뭐만 했다 하면 지쳐 버렸다. 나는 만성적으로 탈진 상태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발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무기력은 이 욕구를 사드라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욕구를 느끼지 못하도록 스스로의 마음을 마비시키는 것일 뿐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가슴 깊은 곳의 느껴지지 않는 아픔이 된다.


어쩌면 이렇게 살아가는 게 오히려 더 힘든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 한켠에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퀴즈>에 지휘자 장한나 님이 출연한 적이 있었다. 설거지만 해도 지쳐서 한참을 쉬어야 했던 나에게, 매일 세 시간씩 자면서 끊임없이 전세계로 투어를 다니고 있는 저 사람에게서 피곤하거나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큰 충격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데 대한 기쁨과 감사가 모니터 밖까지 터져 나왔다.


그로부터 몇 일 뒤 영화관에 가서 <미션 임파서블:데드 레코닝>을 관람했다.

톰 크루즈 님의 열정과 에너지가 영화를 보는 나를 설레이게 했다. 마치 그 기쁨 넘치는 에너지에 설득 당하는 것 같았다.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에너지에 대한 정리는 대략 이랬다.

   * 나는 에너지가 원체 적은 사람이다.

   * 그래서 무엇을 하든 되도록 적게 하는 게 나에게 이롭다.

   * 내가 가진 에너지보다 더 쓰게 되면 나는 상하고 노화된다. - 이게 정말 두려웠다.

   * 나는 나 자신을 위한 에너지도 부족하기 때문에 타인을 위해 쓸 에너지는 없다.

   * 기쁨이나 열정, 또는 사랑의 마음은 에너지와는 관련이 없다.


내가 그 동안 에너지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구나.

다시 정리하기로 했다.


   * 우리는 누구나 무한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 사랑과 감사와 기쁨은 그 무한한 에너지를 활성화 시켜 준다.

   * 에너지의 흐름은 나를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확장시키고 치유시킨다.

   *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에너지를 쓰면 더 큰 에너지가 되어 돌아온다.


에너지에 대한 정리를 다시 하고 나자 더이상 무기력을 선택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도 에너지 넘치는 삶을 신나게 살고 싶어졌다!


그런데... 거기까지였다. 거기에서 더 나아갈 수가 없었다.

장한나는 음악을 사랑했고, 톰 크루즈는 영화의 액션을 사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것이 명확히 있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묻고 또 물어도, 물어보는 나의 목소리만 허공에 울려퍼질 뿐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저 유치뽕짝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들 조차도 자신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사는데, 나는 이걸 아는 게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처음으로, 나를 때려가면서 키운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내가 맞으면서 크지 않았더라면, 나 자신의 마음을 느끼는 게 이토록 어렵지 않았을텐데. 그러면 행복하기가 훨씬 수월했을텐데. 너무 힘드네...


남편은 드라마를 보다 갑자기 오열을 하는 나를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말해 주었다.

"감정이 터져 나오는 걸 보면 이제 마음이 준비가 된 거야. 이제는 좋아하는 게 뭔지를 느낄 수 있을거야. 내 말을 믿어봐."


남편 말대로,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요리를 좋아합니다.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이렇게 느끼고 말할 수 있는 건 내 마음에 찾아와준 기적이었다.

내 마음에 움튼 생명력이었다.


==========


황태국은 내가 자신있게 만들 수 있게 된 첫번째 요리다. 그래서인지 만들 때마다 특별하고 소중한 마음이 든다.

겨울을 맞아 뜨끈한 황태국을 만들어서 쌀국수 면을 더해 먹었다.


 


< 황태국 >


참기름에 무를 볶는다.

황태를 물에 담갔다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준다. 이 때 생선뼈도 좀 발라준다.

무가 좀 익으면 황태를 넣고 같이 볶는다.

파와 마늘도 넣고 같이 볶는다.

국간장과 까나리 액젓, 멸치 액젓을 냄비 바닥에서 좀 끓였다가 섞어준다.

새우젓도 좀 넣어준다.

재료들이 잘 익으면 물을 붓는다. 이 때 황태를 불렸던 물도 같이 넣는다.

황태 대가리를 넣어주면 국물이 더 맛있어진다.

황태국과 미역국은 오래 끓일수록 맛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보통 먹기 전날 저녁에 오래도록 끓여놓는다.


마지막에 달걀을 풀어 불을 끈 다음 고루 부어준다.

청량고추를 기호껏 넣어주고,

파를 고명으로 얹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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