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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04. 2023

우리는 응가 냄새가 닮았다

부부의 식사

8년쯤 전 어느날 저녁, 상하이에 살던 나는 집 근처의 한 와인바에서 어떤 아저씨와 마주앉아 있었다.

나는 삼십대 초반이었고,

흥미를 느끼던 수많은 분야들 (연기, 노래, 미술 ...) 에 노크해 볼 용기조차 내지 못한 채 모두 흐지부지 그만두었고,

나를 여신보듯 하던 어떤 사람과 결혼을 해보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어온 바람에 촛불 꺼지듯 그 눈빛이 사그라들면서 이혼을 했고,

그 후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회사에 취직해 보았지만, 나는 회사 일에는 능력도 없고 적성도 맞지 않다는 것만 증명한 채 (혹은 증명당한 채 - 내가 그걸 증명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므로) 퇴사한 상태였다.

나는 이혼녀였고, 무능력자였고, 백수였다.

내가 인생에서 한 모든 시도는 실패였다.


그 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던 아저씨는 사십대 후반이었다.

부동산 업계에서 잘 알려진 성공을 거둔 사업가였지만, 예상치 못한 편지풍파를 만나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마음에 따뜻함이 있었고,

생각하는 힘과 추진력을 가지고 있었고,

행복한 삶을 살겠다는 방향성이 뚜렷했고,

다른 이들을 도와주는 걸 기뻐했다.


그 날 와인바에서 이 아저씨는 내가 그 동안 겪은 모든 실패가 나에게 굉장한 자산인 거라고 말해 주었다.

나의 멍들고 구멍난 마음을 소중히 여겨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둘이서 고요한 가운데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결혼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거의 모든 식사를 함께하며 살고 있다.

끼니 수로 따지면 만 끼니 가까이 된다.


사실 우리는 굉장히 다른 문화에서 성장해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남편은 성격이 급했던 반면 나는 느렸고,

남편은 생각이 빠르고 논리적인 표현에 익숙한 반면, 나는 생각을 정리하거나 표현하는 데에 서툴렀고,

남편은 가부장적인 가정환경에서 성장해서 그에 기초한 면이 많았던 반면, 나는 부드러운 성격의 아버지 밑에서 자라나 가부장적인 문화를 잘 이해할 수 없었고,

남편은 서울 남자였고, 나는 엄마가 보성 사람이라 전라남도 문화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행스러운 점은, 우리가 비슷한 입맛을 가졌다는 거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맛, 좋아하는 간이 신기할 정도로 비슷했다. 내가 맛있으면 남편도 맛있어했다. 슈퍼에 가서 어릴 적 좋아했던 과자를 집어보자 하면, 둘이서 같은 과자를 집었다.

몇 시간마다 돌아오는 식사시간에 둘이서 맛의 기쁨을 공감하면서 맛에 대해 조금씩 더 알아갔다.

서로를 힘들게 하던 수많은 차이점들이 서로에게 녹아들게 된 시작점은, 같은 음식들을 같은 마음으로 먹는 데에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만 끼니를 함께하는 동안 우리는 서로와 닮아가고 길들여져 간다.



점심 식사 메뉴는 그날그날 다르지만,

아침식사는 우리가 세팅해 놓은 틀이 정해져 있다. 많은 수정을 거쳐서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 우리의 기본 아침식사 >


통밀빵을 굽는다.

- 따뜻한 물 120g 에 메이플시럽 15g 과 인스턴트 드라이 이스트 5~6g 을 넣고 수면이 거품으로 가득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약 5분 걸린다.)

- 통밀 125g 과 소금 2~3g 을 넣고 잘 섞어준다.

- 빵틀에 넣고 20분 정도 있는다.

- 오븐을 180도로 예열해 놓았다가 반죽을 넣고 22분 정도 익힌다.


샐러드에는 로메인을 기본으로 하고 파슬리나 루꼴라 같이 향기나는 채소를 더해준다.

샐러드 드레싱은 그날 그날 다르다.

오늘의 드레싱은 남편이 좋아하는 허브 드레싱이다.

- 양파를 채썰어 찬물에 10분 담가 놓았다가 잘게 다진다.

- 다진 양파에 오레가노, 파슬리, 타임, 로즈메리, 레몬 껍질을 그레이터에 갈은 것 약간, 레몬즙, 설탕, 소금을 넣고 잘 섞는다.

- 간을 보고 맞으면 올리브유를 넣어서 잘 섞어준다.


남편은 달걀 반숙을 좋아한다.

- 달걀을 30분쯤 미리 상온에 꺼내어 놓는다. 혹은 달걀을 미지근한 물에 10분 정도 담가 놓는다. (차가운 달걀을 바로 끊는 물에 넣으면 깨지기 쉽다.)

- 끓는 물에 넣고 5분 끓인다.

- 불을 끄고 2분 10초 정도 가만히 둔다. (달걀 크기가 크다면 2분 25초 정도)

- 찬물에 헹구면서 껍질을 까준다.


감자를 삶는다.

나는 빨리 하기 위해서 감자를 깍두기 모양으로 썰어서 삶는다. 물에 소금을 넣는다.

감자가 익고 나서 끓였던 물을 버리면 전분이 빠져서인지 감자 맛이 덜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감자를 삶는 물을 소량만 해서 그 물을 다 증발시키고 감자만 남도록 익힌다.


그리고 드립 커피.

나는 커피를 내릴 때 뜨거운 물을 쓰지 않는다. 손가락 끝을 넣어 보았을 때 기분 좋은 따뜻함이 느껴지는 온도에서 커피를 내린다.



아침 식사 후 잠시 대화를 나누던 우리는 동시에 장에서 신호를 받았다.

"조금 이따 다시 만나요~"

우리집에는 화장실이 두 개여서, 각자 화장실로 향했다.

볼일을 본 후 남편이 갔던 화장실에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문을 열었다가... 잠시 그 곳에 서서 숨쉬고 있었다.

방금 저 화장실에 가득했던 나의 냄새가 이 화장실에도 자욱했던 것이다. 

만 끼니 같은 음식을 먹으면

응가도 같은 모습이 되어가는 걸까.




* 통밀빵 레시피는 유튜브의 <요리하는 유리>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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