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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Dec 31. 2023

나는 원망을 원한다

쵸코 쿠키

부모님이 돌아가셨던 날 저녁이었다.

"오빠, 저 내일 아침에 부모님 댁에 가자마자 물건들을 정리하기는 도저히 힘들 것 같애요. 시간이 좀 늦었지만 그래도 오늘 그 집에 가서 조용히 마음을 좀 추스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러면 내일 아침부터는 정리를 시작할 수 있을 거 같애요."


집에 들어서자마자 폭풍처럼 밀려드는 슬픔과 혼란 속에서 정신없이 허우적거렸다. 엄마와 나에게 tv 프로그램을 보여주려고 스피커와 텔레비전 손보던 아빠의 모습, 부엌에서 요리하던 엄마의 모습, 같이 앉아서 식사하며 깔깔대고 웃었던 식탁, 그 분들의 손길이 아직도 남아있는 자질구레한 물건들... 눈이 닿는 모든 곳에 아빠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언제나 나를 조건없이 기뻐해 주던 그 집에서 갑작스레 느껴지는 강렬한 휑함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 때였다. 남편이 집을 어떻게 정리할지 회의를 하자는 거였다.

숨이 턱 막혔다. 회의? 오늘은 마음을 추스르고 내일부터 정리하겠다고 서로 소통을 하고 온 상황에서, 왜 꼭 그날 밤에 정리에 대한 회의를 해야 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리는 내일부터 하기로 했잖아요. 지금 꼭 '회의'를 해야되요?? 지금??"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동생이 보는 앞에서 남편에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그 때는 남편이 왜 나의 행동에 그렇게 마음 상해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가 않았다. 누가 뭐래도 그 상황에서 힘들었던 건 바로 나였으니까.


몇 년이 지나, 둘이서 와인을 한 잔 하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그 때 왜 그랬는지.

남편은 그 동안 말없이 품고있던 자신의 속마음을 말해주었다.


그 날 남편 또한 깊이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내가 남편에게 의지할 수 있도록 남편 자신의 힘겨움을 티를 내지 않고 있었을 뿐이었다.

남편은 부모님의 시신 두 구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 추스렀고, 더불어 다소 충격적인 장면까지 목도하면서 마음이 거의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지만 나를 배려해서 말하지 않고 혼자 담고만 있었다. 당시 상하이에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와는 달리 어떻게 상황을 수습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데 중국어도 못하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남편도 속으로는 많이 힘들었지만 일단 주어진 일들을 잘 처리하면서 나와 내 동생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터였다. 회의를 하자는 건 그런 선상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게다가 내 동생 앞에서 남편에게 그렇게 언성을 높인 건 남편에게 너무나 상처되는 행동이었다.

만약 남편이 자신의 형이나 누나가 보는 앞에서 나에게 언성을 높인다면 나는 어떻게 느낄까. 그것도, 도와주려고 힘을 다하고 있는 나한테 그렇게 했다면. 분명 용서하기 어려운 상처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남편의 말을 듣고 어머 그랬군요 정말 아팠겠군요 하고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나는 남편이 나에게 마음을 열고 나누었던 그 때의 대화를 통째로 잊어버렸다. 어떻게 그런 대화를 잊는 게 가능한 건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가 없다. 어쨌든, 그 대화가 머리 속에서 없어지자, 자연스레 원래 가지고 있던 원망이 다시 되살아났다. 왜 하필 그 때 회의를 하자고 했으며, 그걸 거부하니까 왜 그렇게 마음 상해 했었는지...


남편에게 또다시 물었다.

그 때 왜 그랬던 건가요.


그렇게 남편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말았다.

그렇게 진지하게 꺼내 놓은 남편의 마음 한 조각이 나에게는 쉽사리 잊혀질 만큼 별로 중요하지 않았음을 남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들켜버리고 말았다.


혹시 내가 원망을 계속 붙들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남편의 마음을 이해하면 더이상 원망할 수 없으니, 컴퓨터 안에 '휴지통' 파일에 저장하듯, 무의식 속에서 일부러 망각해 버린 건 아닐까.

아빠에게 원망이 많았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자라난 내 안에 정말로 그런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도 인정한다.


그러고 보면, 사랑과 원망은 애초에 한 마음 속에서 공존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모든 경우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의 경우, 이해를 해보고자 하는 마음보다 내가 겪은 아픔이나 손해가 월등히 중요할 때 원망을 한다. 상대방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싶을 때가 많고, 답을 얻지 못하더라도 이해해 보고싶은 마음 중에 원망은 끼기 어렵다.

이해하려는 의도가 없는 마음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입 안 한가득 음식을 문 채로 노래를 하려는 격 아닐까.


...... 나는 남편을 사랑하는 걸까.


======


남편은 몇몇 지인들과 주기적으로 통화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 분들이 마음을 치유하는 과정을 통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도와주고 있다. 오늘도 통화가 있는 날이었다. 치유를 목적으로 통화를 할 때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기 때문에, 남편은 통화가 끝나고 나면 으례 달달한 무언가를 찾는다.

오늘은 남편이 통화를 하는 동안 쵸코 쿠키를 구웠다. 통화가 끝나고 나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통밀 150g

코코아 가루 20g

아몬드 가루 10g

베이킹 파우더 4g

소금 3.5~4g

비정제 갈색 설탕 80g

으깬 초콜렛 칩 20g

으깬 마카데미아넛 10g

을 잘 섞은 다음,


상온에서 부드러워진 버터 90g

메이플 시럽 15g

달걀 하나

바닐라 익스트랙 4g

을 잘 섞어서 반죽해준다. 너무 많이 치대지 않는다.


냉장고에서 30분 휴지시킨 후 모양을 만들어 180도로 예열한 오븐에 15~18분 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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