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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Dec 27. 2023

마음의 온도

황태미역국

신기한 일이었다.

남편의 도움으로 마음의 상처를 꺼내서 치유하는 과정을 경험하다 보면, 치유가 되는구나 싶을 때 몸 안에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걸 느낄 때가 종종 있었다. 내 몸 중에 차가웠던 부분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전체적인 체온이 올라가기도 했다.

마음과 몸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 둘이 어떤 식으로든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건 틀림없는 것 같았다.


꺼내놓기 조금 민망한 이야기지만, 마음이 차가운 게 멋지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에게 시큰둥하고,

상처주는 말을 서슴없이 내던지기도 하고,

돕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잘 웃지도 않고,

잘난 독고다이로 살아가는 스타일.


드라마에서 보면 극 중 제일 잘생긴 사람이 그런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자면..... 십여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 <시크릿 가든> 의 현빈 같은 느낌.

어줍잖게 따라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차가운 모습이 와닿았던 이유는 평생 슬픔을 머금고 살았던 엄마의 영향이 컸다.

자식은 본능적으로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엄마라는 사람이 슬퍼한다 싶으면 엄마의 슬픔을 죽어라고 빨아먹는다. 눈물 흘리는 엄마 옆에서, 내 마음에는 만성적인 슬픔이 단단하게 자리잡았다.

계속 슬프다 보니 에너지도 없어졌고,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냉해졌다.


십대 때부터 한의원에 가서 맥을 짚어볼 때마다 몸이 냉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내가 만났던 한의사 분들 중에 누구도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그런 체질인 거라는 말 외에는.

그래서 '아 나는 몸이 냉한 사람이구나' 라고 나를 정의해 왔다.


상처 치유를 할 때 몸이 따뜻해지는 걸 몇 번 경험하고 나자, 오랫동안 당연한 듯 여겨왔던 '나는 원체 냉한 사람' 이라는 생각에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냉하게 타고났던 게 아니라, 마음이 냉해지다 보니 몸도 그에 따라 냉해졌던 게 아닐까.


한국의 화타 라고 불리는 장병두 선생님에 대한 책 <맘 놓고 병 좀 고치게 해주세요> 에 보면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던 어느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의사로부터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들은 이 여성은 얼마 안 남은 그녀의 인생을 고아원 아이들에게 주고 가겠다고 결심한다. 하루 종일 자신의 모든 에너지와 마음을 고아원의 아이들에게 쏟아붓고 밤에는 쓰러져 잤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났다. 의사가 말했던 죽을 시기를 한참 지났는데도 자꾸만 살아있는 거였다. 이상해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암이 말끔히 없어져 있었다고 한다.


뜨거워진 마음은 암세포조차 녹이나보다.


나의 마음을 따스히 데펴주고 싶은데, 어떤 방법이 있을까. 고요히 앉아서 마음에게 물어보았다.

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허락된 100 가지에 대해 감사를 해보면 어떨까.


1~10

이 글을 쓰고 있는 내가 편안하게 기대어 앉아있는 겨자색 의자, 겨자색과 잘 어울리는 청록색 카페트, 10년째 나와 함께하면서 내가 편리하게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나의 맥북, 지금 나의 등 뒤로 쏟아져 들어오는 따뜻한 햇빛, 집에서 편리하게 연결되는 인터넷 와이파이, 밥솥이 밥을 지으면서 내뿜은 고소한 향기, 리듬감 있게 집안에 울리는 밥솥의 칙칙폭폭 소리, 글 쓰면서 홀짝홀짝 마시는 내가 내린 드립 커피, 식탁 위에서 싱그러운 장미꽃과 안개꽃, 글을 쓰면서 눈을 들면 보이는 벽에 걸어놓은 마른 장미 두 송이


11~20

처음 해보는 거라 너무 달고 너무 딱딱했지만 그래도 맛있었던 애플 크럼블, 겨울에 원래 잘 차가워졌었는데 지금은 따뜻하게 잘 있는 나의 두 손과 두 발, 아늑한 느낌을 주는 마룻바닥, 오늘도 맛있게 애플 크럼블을 구워준 나의 오븐, 내 옆에서 커피를 담은 채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예쁜 문양의 머그컵, 씩씩하게 잘 뛰어주고 있는 나의 심장, 맛있게 먹은 아침 식사를 잘 소화시켜주고 있는 나의 위장,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나의 열 손가락, 부엌 한가운데에서 내가 효율적이고 즐겁게 음식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나의 아일랜드 식탁 (원래는 그냥 식탁이었음), 내가 편안하게 서서 일할 수 있도록 아일랜드 식탁의 높이를 손가락 길이 정도 올려주는 나무 받침대


21~30

현대 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산 예쁜 앞치마 (예쁜 앞치마를 두르며 요리를 시작하면 마음에서 신이 난다.), 식구처럼 한 집에서 우리 부부와 함께하는 좋은 에너지의 책들, 생각할 수 있음에 감사, 나의 폐에 공기가 드나들고 있음에 감사, 암 진단을 받고 나서 나의 내면을 변화하겠다는 선택을 함에 감사, 하루에도 몇 번씩 나의 생각을 담아주는 나의 예쁜 벽돌색 수첩, 어제 밤부터 끓여 놓아서 이제 깊은 맛이 나는 미역국이 식사로 준비되어 있음에 감사,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 때 남편이 사준 휘슬러 냄비 세트 (샀을 때의 좋은 기억 덕분에 쓸 때마다 마음이 훈훈해진다.), 냉동실 안에서 대기 중인 다진 소고기와 통삼겹살과 새우 열마리, 이 집에 오면서 드디어 갖게 된 쾌적한 드레싱 룸


31~40

한 달 여의 전국 여행을 통해 뜻깊게 만난 이 집, 많은 고민 끝에 이케아에서 샀던 부엌의 노란 조명 (분위기 깡패다), 매일 밤 우리 부부가 편안하게 잘 수 있도록 받쳐주는 목화솜 요 (많은 생각 끝에 샀다), 우리 부부가 매일 사용하는 천연 고무로 만든 요가매트, 우리 부부가 같이 만드는 2024년의 소망 리스트, 과외할 때 장만했던 큰 화이트보드 두 개 (떠오르는 생각들을 놓치지 않고 적어놓는다), 캐비넷 안에서 우리 부부를 기다리고 있는 고급 사케, 요리를 손쉽게 배울 수 있게 해주는 유튜브 채널들, 시어머님께서 돌아가시면서 물려주신 아름다운 명품 가방, 겨울에 우리를 따뜻하게 지켜주는 난방 시설


41~50

도서관에서 빌려온 요리책, 나의 청소년기를 외롭지 않게 해준 마이클 잭슨,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이마에 남편이 해준 뽀뽀, 싱잉볼, 암 진단을 받고 놀라고 무서울 때 가이드가 되어 주었던 책 <치유와 회복 (데이비드 호킨스 저)>, 유방암 관련 약을 먹고 경험한 5개월 여의 탈모 후 새싹처럼 새로 돋아나 빈자리를 채워준 머리카락들, 집에서 입기 너무 편하고 따뜻한 유니클로의 블랙 레깅스 (지금도 입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셔서 매일 쓰고 있는 하얀색 그릇들, 엄마가 물려준 예쁜 찻잔들, 15분만에 가는 코스트코


51~60

8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 8분 거리에 있는 한살림 매장, 나의 오똑한 코, 고요히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제주도에서부터 함께해준 나의 작은 냉장고, 오늘 아침에 먹은 샐러드, 먹어도 먹어도 안 질리는 고소한 통밀빵, 나의 드립 커피 맛을 카페에서 사먹는 커피처럼 만들어준 유튜브 동영상 '1타 강사 이상순 강의 오픈', 방에서 나와 물을 마시고 들어가는 남편에게 지금 이순간 느끼는 끌림, 거실을 조금은 더 분위기 있게 해주는 내가 만든 파란색 티슈커버


61~70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는 좋은 에너지의 업로드들, 2023 마지막날과 2024 첫날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한 고민, 시간에 상관없이 빨래를 말릴 수 있게 해주는 나의 제습기 세 대, 나도 사과파이나 피칸파이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남편이 내가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는 사실, 먹을 때마다 느끼는 깊디 깊은 행복감, 지금의 나를 만든 그 모든 경험들, 진지하게 고민하고 골라서 산 우리의 빠알간 쏘렌토, 우리의 차를 볼 때마다 탈 때마다 지금도 느끼는 만족감과 설레임, 긴 속눈썹


71~80

오늘 남편과 함께한 웃음들, 남편의 건강, 마트에 다녀올 때마다 음식을 신선하게 유지해 주는 나의 아이스박스들과 아이스팩들, 내가 나의 마음을 살피고 있다는 사실,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글을 쓰고 있다는 행복감, 꿈꿀 수 있는 자유, 지난 8년 반 동안 남편과 함께한 그 모든 시간, 남편과 함께 만들어온 우리의 관계, 어제밤 남편에게 요가와 스트레치 동작을 리드해준 것


81~90

언제든 뽑아쓸 수 있는 티슈, 언제든 틀 수 있는 수도, 언제든 마실 수 있는 생수, 운동으로 땀을 내는 즐거움을 깨달은 것, 런던에서 1년 살았던 경험, 상하이에서 8년 살았던 경험, 기본적인 생활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점, 남편과 가장 깊은 속마음이나 생각들을 서로 나누고 있다는 사실, 남편이 잘못이나 실수를 할 때 비난이 아닌 격려와 위로를 선택한다는 사실, 남편이 상처에 대한 이해가 깊어서 내면의 치유를 도와준다는 사실


91~100

나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이 전보다 조금 커졌다는 점, 변화할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는 점, 다른 이들을 볼 때 내가 저들의 내면을 다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는 비난하는 감정이 줄어들었다는 점, 감사를 하겠다는 선택,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 남편의 기뻐할 때 느껴지는 기쁨, 신으면 스스로 섹시하다고 느끼는 무릎까지 오는 굽 있는 부츠, 나 라는 사람이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는 사실, 어제밤 잔 잠, 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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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점심은 황태 미역국이다.

황태국도 미역국도 오래 끓일수록 맛있는 것 같다. 그래서 어젯밤부터 끓여 놓았다.


미역을 30분 이상 불려 놓는다.

불린 미역을 적당히 잘라서 냄비에 넣고 참기름을 두른 후 볶아준다. (미역을 불렸던 물은 버린다.)

황태를 물에 담가 놓았다가 적당한 길이로 자른다. (황태를 담가 놓았던 물은 버리면 안된다.)

미역이 잘 볶아져서 색깔이 연해지면 황태를 넣고 같이 볶는다.

다진 마늘도 같이 볶는다.

국간장 (냄비 바닥에 넣고 잠시 끓인 후 다른 재료와 섞어준다), 멸치액젓, 까나리액젓, 새우젓을 넣고 볶는다.

볶는 과정을 충분히 해야 국이 맛있는 것 같다.

나는 다 볶아졌다 싶을 때 5분 정도 더 볶는다.


물을 붓고 끓인다. 황태를 담가놓았던 물도 같이 붓는다.


끓이다 보면 어느 순간 크리미한 맛이 난다.

그 때까지 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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