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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아 Nov 10. 2023

느낀다. '하고 싶다'고

애플파이

이십대 때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그만둔 게 나의 마지막 도전이었다.


십대 때 억지로 맞아가면서 공부를 했던 탓일 수도 있고, 이십대 때 하는 것마다 특출한 성과를 내지 못했던 탓일 수도 있다. 이유야 뭐가 되었든, 어쨌든 그 후로는 어떤 것에도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을 느끼지 못했고,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은 내가 해보고 싶어서가 아닌, 하기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것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한다는 게 점점 거북하고 싫어졌다.

무언가를 잘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이 세상에는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 듯 했다. 어쩌다 잘 하더라도 그게 기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무기력했으나, 그게 심히 자연스러웠던 나머지 내가 무기력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조차 없었다.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이 변태처럼 느껴졌다.


요즘 들어 '하고 싶다' 라는 신기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남편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게 '하고 싶어'졌고,

남편과 배드민턴을 치면서 땀에 흠뻑 젖는 것도 '하고 싶어'졌고,

브런치에 나의 내면을 한 조각씩 꺼내놓는 것도 '하고 싶어'졌다.

전에는 내 안에 내면이라는 게 있는지 조차 잘 몰랐다.


이러한 나의 상태와 변화를 아는 남편은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하면, 고맙게도 그런 나의 마음을 소중히 여겨주고 "청아 하고 싶은 거 다 해." 라며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주었다.


가을 겨울에 접어 들면서 가게에서 사과를 팔기 시작했다.

전에 어느 요리책에서 애플 파이 만드는 법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게 내 머리속에 남아 있었나보다. 가게에서 사과를 파는 걸 보자 나도 사과파이를 만들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딱 보기에도 어려워 보였지만, 어려울 것 같다는 두려움보다 해보고 싶다는 설레임이 더 컸다.

도전하는 마음에는 설레임도 들어 있구나...


저울 위에 볼을 올렸다.

볼에 밀가루 300g 을 넣고, 버터 150g 도 잘게 잘라 넣었다.

그리고 뽀얗고 부드러운 밀가루가 옥수수빵이 으깨진 것처럼 노오랗고 부슬부슬해질 때까지 손으로 주무르고 비비고 으깼다. 생각보다 품이 좀 들었다. 손이 아파왔지만 그래도 계속했다.

다 되었다 싶었을 때 계란 하나와 물 20g 과 소금 2.5g 을 넣고 반죽해 주었다. 하나의 반죽 덩어리가 되었을 때 반으로 잘라 약간 평평하게 펴서 랩에 싸서 냉장고에 넣어 주었다. 그렇게 해서 밤새 휴지시켜 두어도 좋다고 하는데, 최소 권장 시간이 한 시간이라 나는 한 시간만 휴지시켰다가 꺼내서 사용했다.


반죽을 휴지시키는 동안 파이 속을 만들었다.

버터 70g 을 팬에 서서히 녹이고 껍질 깎은 사과를 얇게 썰어 버터와 섞어주었다. 레시피에는 사과 700g 이라고 되어있었지만 나는 그보다 좀 얇게 만들고 싶은 것 같아서 500g 정도만 사용했다.

팔각을 그레이터에 갈아서 가루를 좀 넣고

계피 가루 좀 넣고

설탕과 소금 약간을 넣고 사과와 같이 볶아 주었다.

레몬 껍질도 조금 갈아서 넣어준다.


볶다 보면 사과에서 물이 나와서 조금 흥건해진다.

국물 맛을 보았을 때 단짠과 계피향이 자신이 원하는 파이의 맛보다 조금 더 쎄야 한다. 파이 속만 있는 게 아니라, 파이의 밑면과 윗면의 반죽과 합쳐져야 하기 때문에. 덮밥을 만들 때 소스가 밥과 합쳐질 것을 고려해 간을 조금 더 쎄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과가 부드러워졌다 싶으면 채에 걸러서 사과와 걸러진 물을 둘다 좀 식혀준다.

좀 식고 나면 걸러진 물에 옥수수 전분을 1작은술 또는 2작은술 정도 섞어주고

거기에 다시 사과를 넣고 잘 섞어준다.


한시간 이상 휴지한 반죽을 꺼내서 밀대로 동그랗게 민다. 가운데부터 밀어서 가장자리 쪽으로 골고루 퍼지도록 한다. 나는 전에 이사할 때 밀대를 버려서, 대신 반죽 위에 랩을 깔고 그 위를 원통 모양의 물건으로 밀었다.

아까 반으로 갈라서 휴지시켰으니 반죽이 두 덩어리가 있다.

한 덩어리를 얇게 편 걸로 오븐에 넣을 살짝 오목한 그릇의 바닥에 깔고 가장자리를 좀 정돈해준 뒤, 그 위에 아까 사과로 만들어둔 파이 속을 얹어준다. 가운데 부분을 상대적으로 좀 볼록하게 하는 게 나중에 보기에 좋다.

반죽의 나머지 한 덩어리도 얇게 펴서 길게 잘라 격자 무늬로 얹어준다.

달걀 하나를 풀어 붓으로 위에 발라준다. 익었을 때 보기 좋게 노릇노릇하게 되도록.


오븐에 넣고 180도에서 50분 정도 익혀준다.



남편이 나보다 더 신나했다.

수시로 오븐 안을 확인하면서 파이가 익어가는 상태를 확인하고, 나에게 '파이가 잘 익고 있다', '파이가 노래진 거 같은데 너무 익히는 건 아니냐', '원래 몇 도에서 몇 분 익히는 거냐' ...  하면서 오븐 안의 파이를 나보다 더 걱정하고 기대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파이가 완성되었다.



노랗게 구워진 격자 무늬의 동그란 파이가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러운지, 보고 있으려니 반해버릴 지경이었다.

잠시 식힌 후 남편과 한 조각씩 먹었다.


아아 이 맛... 계피와 버터와 사과의 발란스가 순간적으로 나를 천국으로 데려갔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니... 성취감이 꾸역꾸역 솟아나 내 세포들에 주입되었다.


남편이 말했다.

"이제까지 먹어본 애플파이 중에 최고야."

남편은 꽤 큼직하게 잘라온 파이를 다 먹었는데도, 다시 가서 조금 더 잘라와서 또 먹었다.



나는 오늘 내가 하고 싶은 걸 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해 주었다.


* 사과파이 레시피는 유튜브 채널 <성시경> 의 '사과타르트' 와 recipe30 의 'homemade apple pie crusty and flaky' 를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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