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레 사케
평생 누군가를 동경하며 살아왔다.
누군가를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감정에 아주 익숙하다.
내가 우러러보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을 잘 알고 자신만의 색깔과 능력을 극대화 시켰다. 그러나 그들을 동경하는 나의 마음은 그들과 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들을 따르는 데에 온 마음을 다 써버려 정작 나의 내면에는 무심했다.
내가 첫번째로 우러러 보았던 인물은 마이클 잭슨이었다. 청소년기 내내 그가 만들어 놓은 음악 세계 안에서 살았다. 다른 어느 가수와도 다른 그의 음악만의 독창성, 그의 앨범과 무대의 완벽함, 그리고 여성적이면서도 남성적 듯한 오묘한 매력이 좋았다.
그의 음악을 귀 안에 넣고 살아가면서 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소설 <토지>를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박경리 작가님께 매료되어 갔다. 한 인간의 내면에 그토록 아름다운 세상이 펼져지고 가슴이 닳아버릴만큼 절절한 스토리가 창조될 수 있다는 게 놀라우면서도 부러웠다. 시를 한 절 한 절 머금는 듯한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가다 생각했다.
아아 나도 박경리 작가님같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메릴 스트립이 감정을 표현해 내는 장면들을 보다 또 생각했다.
삶을 표현하는 일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그래 나는 배우가 되어야겠다.
그러고는 다니던 대학교를 휴학하고 일년동안 연기학원에 다녔다.
누군가에게 반해서 훅 빨려가는 일은 30대에도 빈번하게 있었다.
남편과 <디어 마이 프렌즈> 드라마를 보면서 노희경 작가님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다. 그 분을 동경하는 마음을 품다가 또 말했다.
"오빠, 나 대본 쓸거야. 작가가 되어싶어."
성장기도 다 지나 마흔의 나이에 아이처럼 '이거 될거야' '저거 될거야' 하는 생각이 공이 튀듯 여기서 쿵 저기서 쿵 하는 나의 패턴에 남편은 기가 차 했다.
보다 못한 남편이 "청아야, 그건 청아가 아니야." 라고 하면 마치 공격받는 것처럼 마음이 상하곤 했다. 그리고 왠지 더 집착이 생겨 소리쳤다. "아 몰라, 할거야!!!!!"
....... 그러고는 아무것도 안 했다.
루이스 헤이의 <치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라> 책에서 거울을 볼 때마다 나 자신의 눈을 바라보며 "있는 그대로 사랑해." 라고 말해주라는 글을 보고 실천하고 있다. 처음엔 말 한마디 하는 게 뭐 그리 의미가 있을까 하고 생각했지만, 한 달 정도 하다 보니 마음에 변화가 느껴졌다. 사랑한다고 말을 해줄 때마다 나 자신에게 마음이 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나를 사랑하니까 나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그 동안 왜 그토록 타인들을 동경하고 그들의 모습이 되고 싶어했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나 자신에 대한 미움이었다.
애초에 나에게 없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들을 동경했으면서도, 내가 동경하는 이들에게는 있는 것들이 나에게 없다는 걸 인정하기가 너무 아팠다. 나에게는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나 춤 실력도, 메릴 스트립의 감성과 표현력도, 박경리 소설가님의 이야기꾼 기질도 없었다. 그것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 내가 몹시도 미웠지만, 미워하고 있다는 것조차 동경이라는 강한 감정에 가려져 느끼지도 못했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고 싶다는 건, 그 이면에서 내가 나를 싫어하고 다그치고 무시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마치, 나는 짧고 굵은 다리를 가졌는데, 길고 가는 다리를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청바지를 억지로 입고는, 거울에 비친 그 바지가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이 싫어 계속 내 모습에 손가락질을 해대는 꼴이었다. 그러면서도 청바지를 벗고 싶지 않아 꼭 붙들고 있었다.
나는 청바지가 어울리지 않아서 내가 싫었던 걸까,
아니면 나를 싫어해서 굳이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를 나에게 입혔던 걸까.
비로소 나는 누군가처럼 되고 싶다는 감정이 설레임보다 고통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서 자연스레 그 집착이 내려놓아졌다.
그러자 가슴 안이 갑자기 휑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슴을 꽉 채우고 있던 집착은 없어졌지만, 그 자리에 응당 있어야 할 나 자신이 아직 자리잡지 못한 것 같았다. 불편한 진공 상태였다.
잠시 두려웠지만 괜찮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그게 어떤 종류의 변화였든지 간에, 변화가 있을 땐 항상 두려웠다. 이 변화의 방향이 기쁘니까, 이 일시적인 두려움은 안고 가보기로 한다.
< 히레 사케 >
복어 지느러미를 토치에 그을린다. (혹은 가스불에 익힌다.)
사케를 75도로 중탕한다. (혹은 포트에 넣고 데운다.)
그을린 복어 지느러미를 사케에 넣고 3분 정도 두어 우러나오게 한다. (그 동안 뚜껑을 덮어 식지 않도록 해주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