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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함다행 Apr 30. 2023

두줄과 바꾼 두캔


누구나 살면서 여러 번 상상해서 완전히 맘에 쏙 들게 상상하는 어떤 장면이 있을 것이다.  이상적 로망을 가득 채운 그런 장면 말이다. 내 친구에게 그 장면은 하얀 한복 드레스를 입고 신랑·신부 입장을 하는 장면이었기에 한복 드레스를 구입하면서 로망을 실현했다. 또 다른 친구는 프러포즈를 받는 장면에 대한 구체적 기대가 있었기에 남편에게 세세하게 알려주고 남편도 잘 준비해서 아주 편안하지만, 고급스러운 캠핑장에서 그 로망을 채우게 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난 기대하는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프러포즈건, 결혼식이건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도 살짝 궁금하지만 궁금해하지 않으려는 날이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나 그 어디를 봐도 그 장면은 대부분 환희에 휩싸였다. 난 과연 나도 그렇게 환희에 휩싸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잠이 우울증 증상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아이러니하게도 난 잠을 제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어떤 때보다도 활발하게 취미 모임, 동네 모임 등등에 나가며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때였다. 그 열정이 과했을까? 그날의 피곤함은 좀 컸었다. 잠시 나갔다 와서 몸컨디션도 축축 처지는데 그날따라 저녁때 집에 온 남편은 너무 지쳐있었다. 가볍게 씻고 컴퓨터 방에 들어가 버린 남편의 등을 부엌에서 바라보니 괜히 울컥했다. 내가 잠에 빠져있을 때도, 다시 일어나려고 애쓰는 지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남편이 생각나더니 매일 와서 나와 하는 이야기가 게임 이야기뿐인 것도 생각나면서 서러웠다. 한번 서러움으로 물꼬가 트인 기분 상한 내 생각들은 잭의 콩 나무 처럼 갑자기 머릿속에서 배배 꼬이면서 쑥쑥 자라났다.     

'나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2년간 그렇게 앓아도 모르지?'

'연애할 때는 그렇게 몇 시간씩 전화로 수다 떨더니, 이젠 잡은 물고기다 이거지?'

'게임 이야기 외에 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데, 나에게 관심이 있겠어? 없겠지.'     

오만가지 생각이 쑥쑥 자라날수록 컴퓨터 방에 들어가 있는 남편의 등이 나에게 어마어마한 외로움으로 느껴졌다. 마치 무협지에 나오는 만년 한설이 쌓인 얼음봉우리 같아 보였다. 결국 잭의 마법 콩 나무 처럼 쑥쑥 자라난 생각은 '너 밥해줄 시녀가 필요해서 결혼했니?'라는 생각으로 구름을 뚫고 성장을 멈췄다. 서러웠다. 그 서러움을 누르려 했지만 애써 기운을 끌어모아 바깥으로 나도느라 지칠 대로 지친 나의 에너지는 그 서러움을 결국 놓쳐버렸다.     

한 시간가량 남편과 싸우고 나니 더 이상 말을 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휴전은 선언하고 냉장고를 열어보니 남아있는 맥주 2캔이 반갑다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얼른 냉동실에 맥주 두 캔을 넣고 쥐포와 오징어를 구웠다. 거실에 안주를 가져다 놓고 내가 좋아하는 미국 드라마까지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니 방금까지의 서러움만큼 흡족했다. 완벽해! 오늘 낮의 힘겨움, 저녁에 서러움은 이 맥주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을 뿐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신이 나서 거실에 앉아 맥주를 뜯으려는 그 순간, 갑자기 생리주기가 생각났다.     

'아…. 맞다. 나 생리할 날짜가 지난 거 같은데? 이번 달에도 배란일에 숙제했으니 혹시 모르니까 임신 테스터기를 해볼까? 괜히 찜찜하니까'     

완벽한 맥주 차림상에 너그러워졌기 때문이었을까? 이미 9개월간 노력했음에도 임신이 안 되었었기 때문에, 어차피 오늘도 안되었을 거로 생각하며 편하게 임신 테스터기를 사용했다. 몇분 기다리는 동안 난 다시 술상을 세팅하고 혼자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시원해진 맥주캔 하나에 손톱을 걸고 차가움을 견디면서 '치익~! 소리를 듣는 그 순간 알람이 울렸다. '얼른 확인하고 편하게 마셔야지!'라는 생각으로 화장실에 달려가 확인한 임신 테스터기에는 선명한 두 줄이 보였다.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대부분 사람은 이 두 줄에 기뻐 어쩔 줄 몰라 했었다. 뿌듯해하고 행복해했었다. 그러나 나에게 그 두 줄은 절망이었다. 그림의 떡이 되어버린 살얼음 동동 낀 맥주 2캔이 나를 절망하게 했다.  너무 억울했다. 차라리 모르고 마실걸. 마시고 내일 아침에 테스터가 해볼걸. 눈물 나게 절망스러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이를 가진 것 보다 맥주 2캔을 더 소중히 여기는 내가 이상해 보였다. 겨우 맥주 2캔을 못 마시게 된 것에 절망할 정도로 속상해하는 나 자신이 욕심쟁이 같고 생명의 귀함도 모르는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다시 확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봐. 넌 역시 이상해. 넌 망가졌어.
이래서 너 애를 제대로 키우겠니? 어쩌냐?
너같이 망가진 애를 만들 텐데, 너 어쩔래?     

잠을 제어하면서 간신히 잠재웠던 불안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나 같은 불안정하고 고장 난 애로 키우면 어쩌지? 나를 안 닮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미국 드라마 한 편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다. 머리가 너무 복잡했지만, 터덜터덜 남편에게 갔다. 그리고 임신 테스터기를 보여줬다.  그러자 남편은 한숨을 쉬었다.     

"어휴.. 넌 지금 그 이야기를 하면 어쩌냐.."     

"..."     

할말이 없었다. 방금까지 싸웠다는 것도 알고, 그런데도 남편에게 축하받으면 조금 내가 괜찮아질까 싶었지만 소용없었다. 그렇게 내 딸이 우리에게 온 것을 알게 된 날은 남편은 컴퓨터방에서, 난 거실에서 조용히 각자의 시간을 가지는 것으로 끝냈다. 그건 매우 무거운 침묵이었다. 마치 그 어떤 누구도 나의 임신을 축하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게 나에겐 절망이 되었다. 때론 작은 한숨이 세상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단두대의 칼날이 되기도 한다는 깨달음과 씁쓸함이 남는 밤이 되었다. 그렇게 내 딸은 나에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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