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저 그릇이라 생각했다.
언젠가부터 소화가 안 되고 자꾸 속이 매슥거리는 증상 때문에 체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소화제를 하루 종일 달고 살았었다. 일주일간 견디다가 결국 병원을 찾았다.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속이 안 좋아서 병원을 갔는데 임신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나라는 엄마여서 아기가 불안했던 것일까? 아니면 그저 자기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을까?
“선생님. 일주일 전부터 소화가 안 돼서 소화제를 달고 살았는데 괜찮을까요?”
“보통은 임신 초기에는 큰 영향이 없다고 하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 같아요. 그런데 벌써 속이 안 좋으세요?”
“네. 소화가 안 된 것처럼 속이 매슥거리고, 자꾸 불편하더라고요”
“입덧을 좀 하시려나 보네요.”
이때까지만 해도 난 입덧의 무서움을 알지 못했다. 아니, 나의 비위가 이렇게 약해빠졌을 줄은 알지 못했다.
아기집을 확인하고 돌아온 날 저녁 난 늘 하던 대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며 요리했다. 살짝 냄새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럭저럭 할만했다. 그러나 요리를 다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려고 할 때 그만 난 화장실로 달려가야 했다. 냄새 때문에 속이 매슥거려서 토가 나오는 상황은 처음이어서 당황스러웠다. 눈물을 흘리면서 변기를 부여잡는 나를 보며 남편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러나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일주일 뒤부터는 난 음식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파지면 멀미하듯 속이 메슥메슥해서 누워 있어야 했고, 무언가를 먹으면 곧바로 토하고 싶어졌다. 일명 먹어야 입덧이 사라지는 먹덧과 먹으면 토해야 하는 토덧이 함께 왔다. 문제라면 난 토하는 것이 정말 너무나 힘든 사람이었다. 처녀 시절 학교 선배가 술 군기 잡는다며 대작하자고 해서 소주 5병에 막걸리 2 동이를 먹은 날에도 난 토를 하지 못했다. 차라리 어질어질하고 괴로운 술기운을 견디는 것이 토하느라 눈물 콧물 빼는 것보다 더 쉬웠다. 그런 내가 하루에 3번 토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안 먹는 걸 선택하는 건 당연했다.
유일하게 내가 먹어도 아무 반응이 없었던 음식은 아메리카노 커피였다. 산부인과 선생님께 여쭤보니 하루에 한 잔 정도는 괜찮다 하셨다. 그날부터 난 하루 종일 아메리카노 한 잔만 먹었다. 남편이 출근하면 얼른 간단한 청소 같은 걸 끝내고 누워서 미드를 보며 남편을 기다리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하루종일 기다린 남편이 퇴근하면 입덧을 가라앉히려고 시작하게 된 산책을 하면서 커피 한잔 마시는 게 유일한 외출이자 타인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영양적인 면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적어도 아기의 다른 부분은 챙겨야만 했다. 올빼미였던 내가 밤 9시만 되면 잘 준비했다. 임신기간 동안 엄마가 일찍 자야 아기가 태어나서도 일찍 잔다는 말에 난 그렇게 했다. 매일매일 동화책도 읽었다. 전래동화부터 온갖 외국 동화, 임신 출산에 관련된 태교책도 열심히 읽었다. 일부러 햇빛이 있는 시간에 나가서 산책했고, 중간에 감기에 걸렸지만 약을 안 먹고 버텼다. 모든 것은 아기가 중심이었다. 나는 아기를 품고 있는 껍데기 같은 존재였고, 나의 존재의 중심은 아기였다. 그래야만 좋은 엄마가 되는 거로 생각했다. 아니, 난 좋은 엄마가 되어야만 했다. 나처럼 망가진 존재를 만들까 봐 딩크족을 꿈꿨다. 차마 딩크족을 꿈꾸는 이유를 남편에게 밝히고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제안했던 임신 노력 기간인 1년의 막판에 아기가 생겼다. 이제는 좋은 엄마가 되는 길밖에 남은 게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임신은 나에게 공항 검색대 같은 느낌이었다. 여행 때 가장 긴장되는 시간은 공항의 엑스레이 검색대를 지나칠 때인 거 같다. 내 가방에 별게 안 들어 있음에도 가방이 조금 늦게 나오거나 다시 들어갔다 내 가방화면을 유심히 보는 검사원이 있으면 등에서 땀이 쫙 나는 그런 시간. 임신 기간의 일분일초가 나에게는 무사히 통과하기 위한 절차이자 무사히 통과했음을 확인받는 과정이었다. 불안했었다. 비 정상적인 나에게 온 불쌍한 내 아기가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을까? 늘 불안했었다.
그래서 공항 검색대에서 겉옷을 벗고, 물건을 따로 꺼내야 하는 불편함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듯, 임신기간 내내 나의 불편함은 사소한 문제였다. 임신 5개월 차가 되자 난 12킬로가 빠졌다. 의사 선생님은 지극히 불안했던 살 빠짐이었지만,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오롯이 내 아이만 제대로 크고 있으면 내 불편함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아메리카노만 먹으면서, 가끔 너무 힘들면 수액 맞으면서 버텼던 그 시간은 아이를 뱃속에 담고 있는 의무를 다하는 기간이었다. 병원에 갈 때마다 난 검색대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임산모로서의 의무를 얼마나 잘했는지 검사를 하고 잘 해냈다는 딱지를 받는 기분이었다. 남들에게는 기쁘고 설레는 시간이었을 임신 기간은 나에게는 그저 내가 적합한지 안 한 지 검사를 받는 기간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 뱃속에는 아이와 함께 또 다른 것이 크고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나와 함께했던 그것은 결국 내 아이와 함께 크더니 또 다른 문제를 일으켰다. 8개월이 되던 그때 그것은 내 아이를 위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