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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백 Nov 18. 2021

[동화연재] 궁극의 레벨 업

1화 : 첫 만남

  첫 만남




  한여름인데 이상하다. 요금 고지서를 든 할머니가 나를 바라볼 때처럼 분위기가 써늘하다. 


  “전체 열다섯 명, 출석 확인 완료! 잘 들어라. 여기 온 이상, 아무도 제 발로 나갈 수 없다. 3주 동안이다!”


  파랑 고깔모자를 쓴 근육맨의 목소리가 운동장으로 퍼져나간다. 똑같은 모자를 쓴 남자가 세 명 있다. 그 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나머지 두 사람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는데, 시선을 멀리 두고 뭔가를 감시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미래 사회의 인재를 양성하고 게임에 대한 가치관을 바로잡아 주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옆에 서 있는 아이를 힐긋 본다. 아인슈타인 같은 폭탄머리에, 요즘에 누가 저런 걸 쓰나 싶을 정도로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다. 우리 반에 저걸 쓰고 왔다가는 당장 승진이 무리에게 빼앗길 게 뻔하다. 걔들은 그걸 돋보기로 써서 개미를 바직바직 태울 거다. 


  폭탄머리는 고깔모자에 아무 관심 없다는 듯이 땅만 바라보고 있다. 나보다 키가 두 뼘 더 커서 내 머리가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다. 비쩍 마르고 껑충한데도 잘 마른 장작처럼 단단해 보이는 인상이다. 6학년만 모인다고 했는데, 중2는 되는 것 같다.


  “규칙을 발표할 테니 집중할 것!”


  먼 데서부터 먹구름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다. 


  “이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을 관리, 감독하는 조교들이다. 무슨 일이 있으면 파랑 모자를 찾으면 된다. 아플 때 돌봐 줄 ‘메디크’도 상주한다. 그러나 꾀병을 방지하기 위해, 반드시 고깔들의 허락을 받아야 만날 수 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 킥킥거렸다.


  “메디크래, 큭.”

  “흰 날개 달렸겠네.”

  “너 몇 렙이냐?”

  “나 골드2.”

  “난 심해에서 이제 나왔어.”

  “부캐 키워?”

  “어. 아정 먹어가지고.”


  다들 ‘렐크’ 게임을 하는 애들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웅성거리며 얘기를 시작했다. ‘메디크’는 금발머리를 한 간호사 캐릭터인데 흰 날개 한 쌍이 달려 천사처럼 생겼다. 힘이 다 빠진 캐릭터가 가장 값진 무기를 메디크에게 팔면 핑크색 링거액을 받아 게임을 계속 할 수 있다.


  게임 얘기만 나오면 심장에 누가 입김을 불어넣는 것처럼 붕 뜬다. 아이들이 다 캐릭터로 보이고, 말을 할 때마다 채팅창이 열려 얼굴 옆에 글자들이 떠오르는 것만 같다. 공중에 손을 대고 자판을 두드리듯 손가락을 움직여 본다. 빨리빨리 글자를 치고 엔터키를 팍팍팍 누르는 시늉을 해본다. 


  세상에는 게임 용어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한 사람과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사람, 두 타입이 있다. 게임을 하면서 승진이와 통화하면 할머니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아정이가 누구냐? 너 방금 통화할 때 아정 어쩌고 하던데.”

  “아이디 정지라는 뜻인데…….”

  “아이디가 누군데?”

  “인터넷에서 쓰는 이름!”

  “그러니까 누구 이름이냐고?”

  “아, 할매는 몰라도 돼.”

  “화투 친구는 언제 해 줄 거야?”

  “나 바빠.”

  “한 번만 같이 좀 치자.”

  “이따가.”


  한창 렐크를 하다가 헤드셋을 빼고 뒤돌아보면 할머니는 혼자 화투를 치고 있었다.


  “낙장불입! 아싸, 고도리! 홍단은 갔네. 내가 났어, 고! 쌍피에 초단 좋고!”

  “할매 말이 더 어렵구만.”


  할머니는 마치 친구가 앉아 있기라도 한 듯 벽을 바라보았다. 거긴 아빠가 여행길에 사온,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다. 할머니가 매일 닦고 문질러서 머리가 반짝반짝 빛난다. 


  “이 자식들아! 내 말 안 들려?”


  고깔모자가 소리 질렀다. 사각으로 각진 턱이 단호해 보였다. 수련회에서 본 조교 형들보다 더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다들 언제 대화를 나누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너희는 다섯 명씩 한 조가 될 거다. 한 조씩 같은 방을 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는 얼굴은 당연히 하나도 없다. 어차피 나처럼 게임에 미친 애들만 모인 거겠지만.


  “3주 동안 너희는 세 종류의 미션을 통과해야 한다. 교육과 훈련에는 무조건 참석! 미션 수행과 태도에 점수를 매겨서 상을 줄 것이다.”


  상이 어떤 건지 궁금한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상품권 같은 거면 좋겠다. 게임 캐시로 바꿔서 아이템과 한정판 스킨을 사고 싶다. 여름방학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내야 하다니. 3주면 레벨을 몇이나 올릴 수 있는데. 방학에는 레벨 업도 빨리 되는데. 그걸 다 놓칠 생각에 억울하고 짜증이 날 뿐이다. 


  “지금부터 조원 불러줄 테니 여기 깃발 앞에 서라.”


  고깔모자가 있는 단상 아래 세 개의 깃발이 띄엄띄엄한 간격으로 꽂혀 있다. 해골무늬가 그려진 검정 깃발, 날개가 그려진 하양 깃발, 갑옷을 입은 무사가 그려진 빨강 깃발이다. 렐크에 나오는 세 종족 같다. 


  “나요셉!”


  고깔모자가 부르자 내 옆에 있던 폭탄머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모든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입을 쩌억 벌린 채 폭탄머리를 바라보았다. 전설의 나요셉? 설마 그 아이? 


  “검정 깃발 앞으로!”


  폭탄머리가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키가 커서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폭탄머리는 길쭉한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서 해골 무늬 깃발 앞에 섰다. 애들이 웅성거렸다.


  “쟤 걔잖아. 최연소로 마스터 레벨 올라간 애.”

  “쟨 전설이야. 한번도 진 적이 없어.”

  “완전 소름.”

  “이철봉! 검정 깃발 앞으로.”


  하필 폭탄머리 다음으로 내 이름이 불렸다. 역시나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서 폭탄머리 뒤에 섰다. 녀석이 뒤를 돌아보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었다. 소름이 오스스 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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