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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담백 Dec 28. 2021

[동화연재] 궁극의 레벨 업

12화 : 엄크의 역습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아, 더러워! 왜 그러는 거야?”

  “물 뿌리기 전에 그 손 치워.”


  알거지가 귓밥인지 코딱지인지 정체 모를 뭔가가 묻은 손가락을 쭉 내밀며 아이들을 향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헤헤헤 웃는 얼굴로. 시청각실 앞에서 서성거리던 아이들을 도서실로 모두 몰아넣기까지 채 십 분이 걸리지 않았다. 도서실에서 꺅 꺅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알거지 나이스!”


 우리는 청소도구실로 들어갔다. 열쇠를 밀어넣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드라이버로 본체 버튼을 눌렀는데도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손전등을 비추자, ‘모니터 연결선은 나에게’라고 적힌 쪽지가 보였다. 


  “엄크 짓이야!”


  열쇠가 없으니 본체를 열지 못하는 대신 모니터와 본체를 연결하는 선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이 자식!”

  “어떡하지? 이제?”


  도서실에서 아이들이 웅성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단 도서실로 가자.”


  요셉슈타인의 말에 우리는 모두 청소도구실을 빠져 나왔다.  

  복도 끝에서 고깔모자들이 달려가고 있었다. 우리도 소란스러운 틈에 자연스럽게 도서실에 들어가 아무 책이나 펼치고 앉았다. 


  “어떡하지?”


  슬로맨이 소곤소곤 말했다.

  요셉슈타인이 힌트가 적힌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 보더니 말했다.


  “조선 왕들이 나오는 책을 찾아보자. 책장을 하나씩 맡아.”

  “책?”

  “이거, 책 제목 같지 않아? 근데 청구기호가 없어. 18은 쪽수인 것 같은데.”

  요셉슈타인이 ‘ㅈㅅ의 ㅇㄷ 18-32’을 가리키며 말했다.

  “청구기호? 그게 뭔데?”

  “도서관에 가면 책등에 적힌 숫자 있잖아. 책 찾을 때 쓰는 기호.”

  “아!”


  슬로맨만 빼고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가 아무 반응이 없자 슬로맨이 물었다.


  “너희는 도서관 가 본 적 없어?”

  “거길 왜 가냐?”

  “동네 도서관에 와이파이 잘 터져서 게임 하러 간 적은 있지. 책 빌린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내가 말하자 카더라가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ㅈㅅ, ㅇㄷ이 뭐지?”

  “몰라. 일단 그 초성의 책을 찾아보자.”

  “어느 세월에?”

  “그래도 그 방법뿐이야.”


  요셉슈타인의 말에 우리는 각각 책장을 맡아서 조선시대에 관한 책을 찾아 서가를 헤매었다. 


  “8시 30분이다! 30분 남았다.”


  복도에서 고깔모자들이 외쳤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그런지 책 제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뭐 좀 찾았어?”


  엄크가 슬그머니 다가와서 물었다.


  “어? 아니, 우린 태블릿이 꺼져서 아무것도 못했어.”


  나는 둘러댔다.


  “너희도?”

  “응. 엄크 너도 그랬어?”

  “코코콜라 팝업 뜰 때 클릭했더니 그렇게 되더라고.”


  뭔가 고소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 내지 않았다. 엄크도 나를 보며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엄크 넌 뭐 알아낸 게 좀 있어?”

  “숫자를 더해보고 빼고 해 봤는데 아무것도 모르겠더라고. 죽어서도 밥을 먹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굶어서 죽은 사람이겠지?”


  엄크가 나를 떠보듯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엄크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 했다.

  그때 슬로맨이 책 한 권을 들고 다가왔다. ‘조선의 왕들’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이거, 초성이 일치해.”

  “맞네!”


  나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겼다. 긴장을 해서 침이 말라붙어 잘 나오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너무 많았다. 언제 태어났고 언제 즉위했고 언제 사망했고……. 이걸 다 읽으라고? 


  “야, 잠깐!”


  카더라가 힌트 종이를 들고 내게 달려왔다.


  “10번째 왕 아니가. 10번째.”

  “왜?”

  “빛나는 것을 열 번째로 썼다안카나. 빛나는 것. 왕관. 열 번째니까, 조선의 10대 왕. 제삿밥을 먹을 수 없는 임금.”

  그때 슬로맨이 자신의 머리를 퍽 소리나게 때렸다.


  “나 답 알고 있어. 연산군이야.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 성종과 중종 사이! ㅅㅈ과 ㅈㅈ 사이!”

  “확실해, 슬로맨?”

  “나 한국사 2급이라고. 내가 왜 이걸 기억 못했을까. 바보다, 바보. 다 아는 건데 연관 짓지를 못했어.”

  “주입식 교육 플러스 벼락치기의 한계지, 뭐.”


  알거지가 슬로맨을 놀렸다. 


  “그럼, 18-32쪽을 찾아보자. 빛나는 것을 쓰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고, 그게 암호라고 했어.”

  “왕으로 즉위한 날을 가리키는 거야.”


  책장을 급히 넘기던 슬로맨이 책에서 연산군이 나온 곳을 찾아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요셉슈타인과 슬로맨이 책 속으로 들어갈 듯이 얼굴을 들이댔다. 


  “조선의 제10대 임금인 연산군은 악행을 일삼고 백성들로부터 존경받지 못한 왕이어서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다.”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코코콜라가 눈앞에 잡힐 것만 같았다. 나는 연산군에 대한 설명 아래에 있는 문장을 읽었다. 


  “연산군이 즉위한 해는.”

  요셉슈타인이 손짓으로 재촉했다.


  “1494년!”

  “1494가 비밀번호야.”

  “드디어!”


  우리는 컴퓨터를 발견했던 날처럼 소리 없이 환호를 지르며 살금살금 도서실을 빠져나왔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카더라가 시청각실 문에 달린 잠금장치의 뚜껑을 밀어 올렸다. 우리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꾹꾹 참았다. 


  그때였다. 

  문과 카더라 사이가 순식간에 벌어지더니 마치 땅에서 나무가 솟아오르듯이 엄크가 툭 튀어 올랐다. 그 바람에 카더라가 뒤로 밀리면서 비틀거렸다. 카더라는 금세 균형을 잡고 딱 버티고 섰지만 그 사이 엄크가 잽싸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시청각실로 들어갔다. 


  우리가 시청각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엄크의 손에 카드가 들려 있었다. 우리의 코코콜라를 맛보게 해 줄 바로 그 카드가!


  “엄크, 너 뭐야!”


  요셉슈타인이 소리 질렀다. 엄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큰소리로 웃었다. 


  “너희 뒤를 밟았지. 바보들. 항상 조심했어야지!”

  “너! 이거 반칙이야! 다 이를 거야.”


  슬로맨이 이마까지 시뻘게진 채로 소리쳤다.


  “어떻게 증명할 건데?”


  엄크가 혀를 날름, 하고는 태연하게 물었다.


  “뭐?”

  “내가 반칙을 썼다는 걸 어떻게 고자질 할 거냐고?”

  “네가 지금, 카더라를 밀치고 갑자기 비밀번호를 누른 거잖아!”

  “슬로맨, 너 내가 그랬다는 증거 갖고 있어?”

  “우리가 다 봤지!”


  우리는 다 같이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한 대 때리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때려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얼마 전에 무사조 애들끼리 싸움이 붙어서 주먹다짐을 했는데 그 둘은 사흘 내내 비타민 알약으로만 식사를 해야 했다. 코코콜라를 먹는 것도 금지였다. 보기만 해도 끔찍했다. 어떤 놀이에도 참여할 수 없고 시청각 교육도 받지 못했다. 걔들은 그냥, 좀비나 다름없었다. 


  “바보들. 여긴 CCTV도 없고,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는 것도 불가능한데, 도대체 뭘로 반칙을 증명하겠다는 거야? 할 수 있으면 해 봐.”

  “만약 고깔들이 너를 벌 주지 않으면, 나는 고깔들과 싸울 거야.”


  슬로맨이 부르르 떨며 말했다. 


  엄크가 피식 웃더니 “너, 우리 조 ‘동짓달기나긴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못 봤어?”하고 물었다. 동짓달은 여기서 닉네임이 제일 긴 애였는데, 하루에 20시간씩 게임을 하다가 아빠한테 잡혀 온 울트라급 폐인 아이였다. 돌잔치 때 돌잡이를 할 때도 마우스를 잡았다는 전설적인 게임 덕후지만 레벨은 골드1이어서 미스터리를 남긴 녀석이기도 했다.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고 뺨이 쏙 들어가서 해골 같이 생겼다. 


  동짓달은 게임을 하게 해 달라며 난동을 피웠다. 운동장 밖으로 뛰쳐나갔다가 잡혀 온 뒤 화장실과 샤워실에 있는 모든 수도를 틀어놓아 복도를 물바다로 만들었고 복도 유리창을 세 개나 깼다. 관리실 문손잡이를 부수고 입소할 때 압수당한 휴대폰을 찾아냈다. 그러고는 본관 옥상에 올라가 옥상 문을 잠그고, 죽은 듯이 폰게임을 하다가 한 시간 만에 탈진한 채 발견되었다. 한여름의 태양이 본관 건물을 벽돌처럼 굽고 있던 대낮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동짓달은 보건실에서 이틀 동안 집중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 그 뒤로 잠잠해졌다. 눈은 더 깊숙하게 꺼졌고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유령처럼 걸어다녔다. 식사가 끝나면 고깔들이 동짓달에게 알약을 먹였다. 동짓달의 영혼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여기는 캠프를 가장한 정신병동인지도 몰랐다. 소리 없이 우리가 사라지거나 좀비처럼 변하더라도 바깥에서 그걸 아쉬워할 사람이 없을 것도 같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어른은 없었으니까. 고깔들은 생각보다 무서운 존재인지도 몰랐다. 그 뒤로 아무도 고깔들에게 반항하거나 도망가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자 모두 막막해졌다. 고깔들에게 따지고 대들었다가 이 조용한 동네에서 무슨 짓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참가 동의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학부모의 면회도 연락도 모두 금지라고. 우리는 꼼짝없이 이곳에서 버텨야 했다. 마치 교도소에서 3주간의 형을 사는 죄수처럼.  


  우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엄크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너희가 나를 일러바칠 증거는 하나도 없고, 너희는 나를 벌주지 못하는 고깔들에게 따질 배짱이 없으니, 답은 나온 거 아니겠어? 코코콜라 잘 마실게, 덕분에.”

  “너, 이 나쁜…….”

  “너희도 내가 필요한 날이 올 거야. 그때를 위해 미리 빚 갚는 거라 쳐!”


  엄크가 생쥐처럼 잽싸게 복도로 빠져나갔다. 


  서바이벌 게임을 하는 날이 왔다. 하지만 우리 조는 애초에 싸울 생각이 없었다. 오로지 엄크만 노릴 뿐.


  고깔모자가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를 불자마자 우리 조 다섯 명은 모두 한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엄크는 렐크에서 스파이 무사들이 하듯 수풀 뒤에 몸을 감추고 있었지만 완전히 숨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어디서 페인트 총알이 날아오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오십 발의 페인트 총알을 모두 엄크에게 쏘았다. 


  투닥닥닥! 탓! 탓!


  페인트 총알이 엄크 몸에서 탁탁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짜릿했다. 여기서 나가면 총 게임을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아야, 아야! 나 죽는다!”


  엄크는 알록달록한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모두 두 손을 높이 들고 항복을 선언했다.  졌지만 이긴 기분이었다. 속이 다 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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