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귀인을 만난 날
44화 귀인을 만난 날
준이 친구가 집에 놀러 왔다.
이 문장을 쓰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사실 어색한 건 문장이 아니라 이런 일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이다.
서울로 이사 온 뒤로 우리 집은 더 이상 아이들로 북적이지 않았다.
부산에 살 때는 달랐다.
우리 집은 늘 열려 있었고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다.
사촌 형, 누나, 동생들, 동네 아이들.....
준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던 아이들...
사람이 좋아서인지
아이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그냥 사람을 좋아하는 내 성격 탓인지
우리 집은 늘 “어, 왔어?” 하면서도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준이는 또래보다 느렸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걸 문제 삼지 않았다.
게임을 못하면 기다려줬고, 규칙을 헷갈리면 다시 알려줬다.
그때의 나는 그게 얼마나 귀한 일이었는지 몰랐다.
서울에 오고 나서는 달라졌다.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일도, 초대받는 일도 뜸해졌다.
학교는 커졌고, 아이들은 바빠졌고, 관계는 조심스러워졌다.
준이의 집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준이가 친구를 집에 초대했다.
그 전날부터 준이는 분주했다.
닌텐도를 꺼내고, 마인크래프트를 설치했다.
사실 그 게임은 준이에게 꽤 어려운 게임이었다.
혼자 해보긴 했지만 잘 안 됐다.
“그래도 괜찮아.”
준이는 혼잣말을 하며 열심히 준비했다.
친구들은 보통 준이보다 뭐든 잘한다.
게임도, 설명도, 이해도 빠르다.
준이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이번엔 나도 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랑 같이 게임 속 멋진 데도 가보고 싶다.
그리고 친구가 왔다.
아이 둘은 나란히 앉아 게임을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랐다.
놀러 온 친구는 요즘 보기 드문 아이였다.
게임을 거의 하지 않는 굉장히 잘 자란 아이였다.
조작이 서툴렀고, 방향을 헷갈렸고,
준이보다 더 헤맸다.
준이의 표정이 서서히 바뀌었다.
기대- 당황 -실망 - 짜증.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야! 이거 좀 해봐!”
“아, 하지 마!”
흥분한 준이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용기 내어 놀러 온 아이가 상처받으면 어떡하지.....
'괜히 집에 오라고 했나.
준이가 또 실수했구나.'
그런데!!
그런데 정말 의외의 장면이 펼쳐졌다.
그 친구가 나보다 먼저 나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준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 준아,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려줘.”
“나 이거 진짜 모르겠어.”
“준아, 우리 할 수 있어.”
“내 옆에 잠깐만 기다려봐.”
“내가 이거 해보고 바로 따라갈게.”
아이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눈높이는 낮았고
말에는 조급함이 없었다.
그리고 결정타.
“준아, 우리 같이 화이팅 한 번 하고 다시 해볼까?”
“화이팅!”
두 아이는 진지하게 화이팅을 외쳤다.
그 순간 나는 웃음이 나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오늘 귀인을 만났구나.
특별한 교육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냥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의 속도를 존중할 줄 아는 아이였다.
그렇게 게임은 다시 시작됐고 완벽하진 않았지만 두 아이는 끝까지 함께 했다.
친구가 돌아간 뒤 나는 준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준아, 아까 친구한테 조금 화냈지?”
“응… 근데 걔가 기다려줬어.”
“다음에 친구가 잘 모르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준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알려주면 돼.”
“천천히.”
나는 그 말에 오늘 하루가 다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요즘 내 생각은 아이의 인생에
여러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것도 키워나가는 일 인것같다.
그날 준이는 게임을 배운 게 아니라
사람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아이의 인생에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한 명쯤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든든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