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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Jul 21. 2021

아이의 아픔에 너무 무심했던 엄마, 바로 나

얼마 전 즐겨보던 tv 프로,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구글 수석 디자이너라는 분이 나왔다.   멋진 성공 스토리도 있었지만 자신이 겪었던 우울증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담담하게 얘기해 주셨다.  듣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났다.  비슷한 감정으로 힘들어했던 딸아이가 생각나서인 것 같다.


지금은 최근에 내가 본 중 가장 행복한 얼굴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이번 학기부터 시작되는 대학원 공부가 분명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수시로 밤새워 가며 공부해야 할 것이고, 용돈 벌이도 할 겸 경력을 쌓기 위해 자원한 무슨 리서치 프로젝트까지 시작했으니 앞으로 그 많은 스트레스를 헤쳐나가려면 또 한 번 어두운 터널 속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앞으로 힘든 상황이 오면 이 영상을 보고 위로를 받으라고, 나가는 출구를 찾으라는 마음으로 해당 영상을 카피해서 보내줬다.   시간 날 때 보라고, 힘들 때 떠올리면 도움이 될 거라면서.  

몇 시간 후 답장이 왔다.   눈물이 나려 한다고.  자기의 고등학생 시절과 대학교 2학년 때와 너무 똑같다고. 그런데 걱정 말라고.   앞으로 학기 시작하면 분명 스트레스는 많이 받겠지만, 우울하지는 않을 거라고.  

"I might be stressed but I’m not going to be depressed in my masters"


정말 다행이다.  잘 지나갔구나 싶었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딸아이는 토론토에, 우리 부부는 여전히 밴쿠버에 살고 있다.  물론 휴가로 자주 오고 가긴 하지만 이제는 토론토가 오히려 자기 집같이 편안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찌감치 우리 품을 떠났다.


첫 아이를 키우는 건 누구나 그렇듯이 시행착오가 많다.  요즘 많이들 얘기하듯 우리도 부모가 처음이니까. 

단순하고 무심한 내 성격과 달리 첫째 딸은 예민하고 생각도 많고 걱정도 많다.  너무 착하고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크다. 둘째는 나를 닮아서 별생각 없고, 그냥 세상이 쉽고 편하다.  그러다 보니 둘째한테도 치이고 늘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건 첫째다.  


그렇다면 엄마인 나는 큰 아이를 특별히 더 살뜰하게 챙겼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나는 푸근하게 품어주지 못했고, 나와는 다르게 별일 아닌 걸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에 민감하고 쉽게 상처받는 성격을 지적하고 바꾸려고만 했던 것 같다.  


물론 11학년에 학교 가기 싫다며 전부 온라인으로 돌렸을 때 충격을 좀 받긴 했지만 (이곳에서는 온라인으로 학점을 채우는 경우도 종종 있는데, 한국에서만 학교 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학교를 안 간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졌었다.) 그래도 12학년에는 학교로 돌아왔고 무사히 졸업도 잘했다.   점수도 좋았고, 지원했던 대학에서는 모두 합격증이 왔다.    


밴쿠버와 토론토의 대학을 놓고 고민하는 딸에게 우리는 토론토를 추천했다.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토론토에 비하면 밴쿠버는 시골이기에 좀 더 크고 역동적인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미래에 더 많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비록 영어도 자유롭지 않고 알 수 없는 뭔가에 조금은 주눅 들어있는 이민 1세대이지만, 이곳에서 초등교육부터 받은 우리 자식들은 부디 중심 세계에서 당당하게 뜻을 펼치며 살아가길 바라는, 그냥 부모로서는 당연하고 평범한 생각 때문이었다.  


별 이의 없이 토론토로 갔고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나의 대학시절을 생각해보면 혼자 멀리 가서 기숙사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원했던 꿈이었는지..  그 사실을 떠올리며 딸에게 계속 물어봤다.   너무 좋지?  혼자 거기서 기숙사에 친구들이랑 있으니까 너무 좋지?   대답은 늘 시큰둥했고.   

운동을 해서 그런지 사춘기도 늦게 와서 대학생 되고 방황이 시작되는구나.  그냥 이렇게 생각했다.

그때만 생각하면 정말 너무나 후회스럽다.  딸 성격이 나와는 다르다는 것을 왜 미리 헤아리지 못했는지.  내가 좋으면 딸도 좋아할 거라 생각하다니.   참으로 어리석다.


2학년이 지나고 여름 방학에 밴쿠버로 왔을 때 일이다.   친구네 집에서 꽤 큰 파티가 있었고, 술도 잘 못하면서 한잔 했던 것 같다.  밤에 데리러 갔는데 약속시간에 나오지 않아서 한참을 기다렸다.  한참만에 술 냄새를 풍기며 차로 들어오는 딸을 보니 화가 훅 올라왔다.  보수적인 남편이 이 모습을 봤으면 난리 났겠다 싶어서 먼저 한마디 했다.   아빠가 봤으면 어쩔 뻔했니, 이게 뭐야.  토론토에서도 이렇게 살아?   하며 해서는 안 되는 전형적인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때 우리 딸이 폭발했다.  그렇게 많이 우는걸 처음 봤다.  

차 안에는 아빠도 둘째 딸도 없었고, 우리 둘 뿐이었다. 밖은 캄캄한 밤이었고 술기운도 있었기에 분위기가 완벽하게 잡힌 것 같다.  


엉엉 울면서 그동안 상처받은 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나는 진짜 몰랐다.  우리 딸이 그동안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속앓이를 했다는 것을 몰랐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준 상처부터 대학생이 되고 가족도 없는 외지에서 혼자 겪은 우울증까지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그동안 왜 얘기 안 했어.  그런 거 있으면 그때그때 말을 했어야지.  그래서 서로가 노력해서 해결을 했어야지.  자존심 상하고 창피해서 얘기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내 가슴은 철렁 철렁 내려앉았다.  그렇게 우린 차 안에서 세 시간 정도를 있었던 것 같다.  얘기하다가 소리 지르다 부둥켜안고 울다가를 반복하면서.


그동안 전공이 자기랑 안 맞는다고 다른 과로 다시 들어가서 일 년을 다녔다가 그것도 안 맞는다고 다시 예전 전공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도 있었고, 10년 넘게 해온 리듬체조 선수생활을 대학과 동시에 그만두면서 든 공허함도 있었던 것 같다.   특히 큰딸은 리듬체조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컸다.  계속하고 싶어 했지만 리듬체조는 선수생명도 짧고, 계속한다고 해서 미래에 코치 말고는 할 것이 없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원치 않는 은퇴를 하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또, 가족 없는 토론토로 혼자 내쳐졌다는 생각에 더욱 가라앉았던 것 같다. 내버려졌다는 표현을 자꾸 쓰는 걸 보면 분명 우리 의도와는 다르게 받아들인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더 큰 세상에 발을 내딛으라고 토론토를 추천했던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강요는 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혼자 세상과 상대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었나 보다.  




다음날 나는 아직 정리가 안된 상태라 남편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국식으로 사고하는 보수적인 남편과 여기서 자란 애들 사이에 문화 차이는 좀 큰 편이라 좁혀지지 않는 갈등이 늘 있었다.  애들이 커가면서 이 갈등은 점점 더 커졌고 가운데서 나는 이쪽저쪽을 이해시키기에 바빴다.  이제는 우리가 먼저 좀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걸 풀어가야 하나 고민이 시작됐다.  대화만이 살길이다 싶어서 슬쩍슬쩍 눈치를 보며 대화를 시도했다.   일단 리듬체조 선수를 다시 하고 싶다고 한다.  지금부터 나는 우리 딸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원하는걸 다 해주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무조건 오케이 했다.   은퇴 후 2년을 쉬고 나서 다시 선수 생활을 한다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하고 계획 없는 생각이다.  하지만 딸이 간절히 원하니까.  다시 한번 원 없이 해봐야 미련이 없을 것 같아서 그냥 하라고 했다.  휴학을 하고 밴쿠버에서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시합 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몸부터 만들어야 했다.   내 입장에선 같은 리듬체조를 했던 둘째 딸이 막 대학생이 돼서 은퇴를 했기에 이제 체육관 왔다 갔다 운전할 일은 없겠구나 했는데 다시 그 일상이 시작됐다.  


그래도 그때 한번 한바탕 울며 쏟아내고 난 후 조금씩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계속 대화를 하는 것도 도움이 됐고 원했던 운동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제일 강력한 약이었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라는 것도 좀 있었던 것 같다.  나보다 늘 남을 더 의식하고 배려하다 보니 정작 자신만 더 괴롭히는 결과가 되는.  그래서 그 이야기도 계속해줬다.  일단 지금은 너만 생각하라고, 좀 더 이기적이 돼도 괜찮다고.    

물론 중간중간 위기가 있긴 했지만, 이제는 그전보다 조금 더 성숙했고 정신력도 아주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았다.  




결국 온 힘을 다해서 연습하더니 BC Championship에서도, Western Championship에서도 1등을 하고 시즌을 끝냈다.  National Championship에서는 원했던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만족이다.  

나는 다음 해에도 계속하고 싶다고 할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대학으로 돌아갔다.  최선을 다해서 다시 해봤기 때문에 이제 미련이 없다고 했다.  얼마나 다행인지. 

아빠와의 갈등도 많이 풀어졌다.   그동안 남편을 꾸준히 이해시키고 세뇌(?) 시키고 노력한 결과 모두가 좀 둥글둥글해졌다.  부모 자식 간에도 서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딸아이가 원하는 공부도 방향을 잡으면서 방황은 줄어들었고, 자연스럽게 자존감도 조금씩 올라갔다. 그러던 시기에 남자 친구도 생겼다.  원래 일이 꼬이려면 한꺼번에 꼬이고 풀릴 때는 한꺼번에 다 풀린다고 하더니 진짜 그 말이 맞는 듯하다.   1, 2 학년 때 망쳐놓은 학점을 올려야 한다고 갑자기 공부도 엄청 열심히 하더니 3, 4 학년에는 거의 전과목 A를 받았다.  취직과 대학원을 놓고 고민하다가 교수 추천으로 대학원도 가게 되고 여러 교수들이 같이 프로젝트하자고 제안을 하는 모양이다.  일이 풀릴려니 이렇게 풀린다.  

이렇게 자기가 한 일에 인정을 받으니 요즘은 너무 행복하다고 한다.  처음으로 자신만의 인생을 제대로 사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한다.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온 느낌.  보내오는 사진을 보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난다.  편안하고 행복하다는 것이.  너무나 다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차 안에서 우리가 엉엉 울며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싶다.  아찔하다.  

엄마인 내가 딸 마음도 제대로 못 읽고 우울증만 키워줄 뻔했다.  

살다 보면 이런 위기가 몇 번은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조금은 강해진 딸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는 진짜로 딸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뭘 한다 해도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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