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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 Dec 03. 2021

엄마의 편애 아닌 편애를 받는 나는 막내딸




얼마 전 우리 집에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정말 어려운 것이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 같다.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절대 좁혀지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다.


내 위로 언니가 두 명, 딸 셋 중 난 막내딸이다.  


어릴 때부터 셋 중에 몸이 제일 마르고 약한 나는 엄마의 특별 관리를 받았다. 그때부터 언니들은 엄마가 나를 편애한다고 생각했다.  언니들은 공부도 다 잘했는데 엄마는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주긴 했다.  나는 맨날 아파서 골골거리니 공부를 안 해도 별 잔소리 없었다.  


언니들은 이것저것 과외도 많이 했는데, 나는 하기 싫다고 하면 안 해도 되었다.  

언니들은 살찐다고 못 먹게 하는 과자도 나는 먹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니들이 열 받을만하다.  먹을 거 못 먹게 하는 게 얼마나 서러운데.  그 어린 나이에 …


그래도 엄마의 극성이 좀 보탬이 됐는지 언니들은 나보다 훨씬 좋은 명문대를 갔고, 직장도 나보다 훨씬 좋고 돈도 더 잘 벌었다.  그래도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엄마는 늘 더 욕심을 내었고 언니들은 버거워했던 것 같다.  


언니들에게는 그때부터 쌓인 트라우마가 있었던 것이다.  아빠보다 늘 엄마 주장이 더 세게 작용했고 아빠도 그걸 편하게 생각했으니 엄마 아빠 사이에선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강한 엄마는 딸 셋을 훌륭하게 키우셨고, 재산도 잘 키우셨고, 아빠와는 평생을 함께 여행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셨다.  크리스마스나 명절마다 나름대로의 이벤트를 준비해서 손주들과도 좋은 시간을 보내려 하셨고.  

정말 훌륭한 엄마고 아내이며 할머니시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 모두가 항상 좋기만 할 수는 없었다.  나도 가끔은 그랬지만 언니들은 조금 자주 정말 엄마를 힘들어했다.  아무리 잘하고 노력해도 엄마를 만족시켜드릴 수 없었으니.




이제 언니들도 나도 50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 세월 중 절반인 25년을 나는 외국에서 살았고, 언니들은 엄마 아빠 곁에 있었다.   그동안 우리 세 자매 가정의 대소사에 엄마는 늘 목소리를 내셨다.  언니들은 대부분 엄마와 부딪혔고 나는 늘 그냥 받아들였다.  나는 멀리 살고 있으니 그냥 간간이 하는 전화 통화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사실 엄마의 편애가 좀 있긴 하다. 그냥 막내딸이라는 것만으로 나의 모든 것은 용서가 된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은 늘 맘에 들고, 언니들은 못마땅해하니 그걸 언니들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모두 늙어가는 이 마당에 언니들의 상처가 이렇게 폭발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얼마 전 드디어 일이 터졌다.  사소한 일로 시작했지만 언니들은 엄마한테 심한 말을 쏟아부었고 엄마도 언니들 가슴에 못을 박았다.  한데 문제는 이런 중간중간에 엄마는 나만 챙기는 발언을 하시는 모양이다.

언니들 입장에선 섭섭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니 하다가도 이게 몇십 년 반복되다 보니 언니들도 폭발한다. 


중간에서 어떻게 중재를 해보려 했으나 일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급기야 언니들 입에서 “엄마한테 딸은 너밖에 없으니 앞으로 네가 알아서 잘 모셔라”, “나도 갱년기라서 감정이 통제가 안된다.  그동안 엄마한테 받은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아서 더 이상 나도 뭘 어찌할 수가 없다.”  … 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엄마 말을 들어보면 언니들이 엄마한테 기가 막힌 막말을 했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온다고 흥분을 한다.  평생 그렇게 자신감 많고 자기주장이 강했던 엄마가 팔순이 지났다고 해서 그 성향이 달라질 리 없다.  몇 년 전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 후, 어쩌면 조금 더 고집이 세지신 것 같다.  엄마 입장에선 분명 자식을 위해서 하는 말과 행동인데 그걸 꼬아서 받아들이는 딸들이 괘씸한 것이다.  언니들은 엄마의 표현 방법이 잘못됐다고 한다.  내가 엄마와 통화를 해보면 절대 날 편애하는 게 아닌데 언니들과 날 선 대화를 하다 보니 이런 오해가 계속된다.


나는 멀리서 말만 하는 입장이니 언니들한테 늘 미안하다.  때마다 직접 몸으로 챙기고 신경 써주는 것은 언니들이니 나는 늘 미안하기만 하다.  이런 사건이 생겼을 때, 양쪽 얘기를 들어보면 모두 너무나 이해가 가고 공감이 간다.  하지만 그 둘의 사이는 내 노력으로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악화가 되는 것 같아서 침묵하고 있다.  내가 가운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정말 속상하고 안타까울 뿐이다.  세월이 해결해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하긴 나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거의 두 시간을 전화 통화하면서 매번 애틋하고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엄마의 잣대로 보면 나는 좀 답답하고 한심하게 살고 있는 딸이다.  엄마는 내가 더 공부하고, 더 바깥 활동을 하고, 더 꾸미고 살기를 바라신다.  나이 드시면서 표현이 조금씩 더 과격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내가 마음이 좀 상하는 대화를 하고 나면 전화 끊고 이틀은 우울하다.  엄마한테는 속이 상해도 웃으며 들어주기만 했으니 괜히 옆에 있는 만만한 남편만 피해를 본다.  나는 지금 이대로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는데 옆에서 자꾸만 내가 잘못 살고 있는 듯이 말을 하니 나라고 기분이 좋을 수는 없다.




이런 일이 있고 며칠 후 나와 우리 딸들의 관계가 또 삐그덕했다.  나도 딸이 두 명 있는데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   큰딸은 우리가 작은 딸만 편애한다고 어릴 때부터 생각해왔다.  그런 마음을 사춘기 지나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우리 의도와는 상관없이 큰딸은 꽤 오랫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고 지금까지도 그 부분에는 예민하다.   우리도 그것을 알아차리고 조심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다.  

우리 딸도 그렇게 아픔을 품고 살면 안 되는데 싶어서 오늘도 노력한다.   


언니들을 봐도 그렇고, 어릴 때 부모한테서 받은 상처는 나이가 든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큰언니는 60세가 다돼가는데도 그 분노가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커져가는 것 같다.  이제 세월에 대한 억울함도 보태져서 그 크기가 더 커졌다.  


이 세상 모든 엄마와 딸의 관계가 회복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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