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가 계속 고민을 하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사주를 좀 보거든요. 오해는 마시고요. 정이씨가 걱정이 돼서드리는 말인데요, 실은 제가 잘 아는 역학을 하시는 분께도 알아보았는데, 정이씨가 올해 참 안 좋대요." 남자는 여자를 힐끗 쳐다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말에 종교가 뭐냐고 물었다. 남자는 불교라고 대답했다. "잠을 못 자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는 거예요. 올해 운수가 많이 안 좋다 보니 걱정되는 건 당연하죠. 이걸 풀고 가야 탈이 없어요."
남자는 여자가 걱정이 많아서 잠을 못 잔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절에 가서 기도하는 액막이 같은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정성을 들여해 보시면 훨씬 수월하게 모든 일이 잘 되실 거예요. 건강도 좋아지고요. 제가 정이씨를 나쁘게 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많이 힘들어지실 거예요. 저도 좀 사주를 본다고 했잖아요. 제가 보기에도 나쁜 기운이 느껴져서 기도하시는 분께 확인해 본 거였거든요. 하여간 하시면 좋을 거예요. 분명히"
여자는 불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스님이 기도를 해 두신다면 나쁠 건 없겠다고 여겨져 50만 원을 들여 기도를 신청하기로 했다. 이 일은 후에 여자에게 오십만 원이 두고두고 아쉬워 생각나는 일이 되었다.
남자는 선감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예식을 저녁 8시경에 하자고 했다. 여자는 이 근처에 스님이 계시는 포교당이라는 곳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조금은 긴장되지만 그래도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설렘도 있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즐거운지 노상 웃으며 아직은 추운 밤길을 걸었다. 십오 분 거리에 가까운 곳이었다. 6층 건물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2층 계단을 올라가 어느 문 앞에서 남자는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자도 머뭇머뭇 따라 들어갔다. 넓고 깨끗한 거실로 들어 선 남자는 여자에게 느껴지는 에너지가 다르지 않냐고 물어보았지만 여자의 대답을 기다린 물음은 아니었다. 그저 이곳 에너지가 특별하고 매우 높으며 신성하다는 것을 인지시켜 주고자 한 말이었다. 여자는 남자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별다른 느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너무 세속적이고 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것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을 뿐 오히려 남자가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때 스님이 아닌 70은 넘어 보이는 한 여자분이 부스스한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와 인사를 했다. 이 여자가 선감이라는 사람이었다. 스님이 아니었다. 보살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여자는 어리둥절했다. 선감은 친절하게 맞이하며 아직 상 차리는 중이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이십여분이 흘렀을까 선감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타났다. 선감은 여자를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한복으로 갈아입으라며 분홍색 고름이 달린 하얀 저고리와 초록색치마, 풍성한 속치마와 버선을 꺼내주었다. 여자가 시키는 대로 갈아입고 수줍게 거실로 나오자 남자는 벌써 한복을 입고 여자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한복을 입은 여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예쁘네요"하고 말했다.
남자는 여자가 한복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선감은 한복을 입고 어색해하는 여자에게 안경도 벗으라면서 "저기 정성을 들이는 곳에는 한국 것만 들일 수 있어요. 그래서 한복을 입는 거예요. 안경은 원래 한국의 물건이 아니잖아요."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제단 상차림에는 버젓이 외제 포도주가 놓여 있었다. 여자는 순간 뭔가가 잘못된 느낌이 들어서 물었다. "무슨 종교예요? 불교 맞아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일 뿐 선감도 남자도 분명히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서두르며 예식을 시작했다. 알아듣기 힘든 경문 같은 것을 읽으며 네 번, 두 번, 큰 절을 하게 하고 오른쪽으로 몇 걸음 옮겨 또 절을 하고,...왼쪽으로 몇 걸음 옮겨 절을 했다. 이러기를 두세 번 반복한 것 같다. 여자는 큰 절에 익숙지 않은 데다 숨이 턱에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복 치마는 왜 이리도 밝히는지 뒤로 나자빠질 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반면에 남자는 꽤나 익숙해 보였다. 문득문득 경문도 외우고 있는 듯했다. 지옥 훈련이라도 받은 듯 여자는 땀에 흠뻑 젖었을 무렵 예식이 끝났다.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와보니 음복하자며 제단에 있던 포도주와 과일, 떡이 상에 차려져 있었다. 남자는 정성을 들인 후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며 이상하게 예식을 마치면 음식들이 훨씬 맛있게 변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정말 그냥 너스레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남자는 진심이었다. 그리고 예식 중에 여자의 조상님들이 내려와 흐뭇하게 웃고 계신 것을 봤다며 모두 점잖고 격이 있는 분들이었고 만족스러워하셨다는 말도 했다.
이 남자의 종교는 무엇일까? 이 남자는 영적인 깨달음이 있어 여자의 조상님들을 정말 볼 수 있었던 것일까? 어느 불교의 정성 어린 예식을 치른 것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예식을 진행한 70대 여자는 선감... 남자는 보정이라고...처음 듣는 명칭이었다.
이 남자 정말 불교 신자일까, 진심으로 여자를 위한 의도로 이 예식을 권한 것일까...
여자는 남자의 배웅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이 들어 한 남자를 만나 낯선 경험을 하면서 정리되지 않는 감정 소모가 의문스러워지는 저녁이었다. 얼마 전 한 후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언니는 남자를 너무 몰라. 이 남자 저 남자 좀 만나 봐"
그래서 만난 첫 남자였던 이 남자는 어떤 행성에서 왔는지 모를 독특한 사람이었다. 생소하고 익숙지 않은 경험들을 선물 받은 느낌이었다. 산타도 주지 못할 만한 기묘한 선물을...
여자는 이것도 사랑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보이지 않는 별이라도 찾는 듯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사랑다운 사랑이 어딘가 있지 않을까. 이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도 '별스런 행성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별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없는 것은 아닐 테니까'하고 우기고 싶은 아니 믿고 싶은 마음이 컸다. 여자는 묘한 희망을 꿈꾸며 자신을 여보라고 부르던 자칭 남편 같은 애인인 남자와 마지막 인사를 혼자 고했다.
(위의 그림은
누군가가 조종하는 줄에 의해 움직이는 피에로가 한 여자를 이끌며 춤을 추려합니다. 그 춤은 오래가지 못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