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도 수 십만개 아니 수 천만개의 글과 말이 쏟아져 나오는 과잉 미디어의 시대 속에서 - 자신의 관심사만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알고리즘 탓인지도 모르지만 - 오히려 그 수많은 글과 말 속에 커다란 공백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무언가를 글로 써내고 말로 뱉어내지만 그 수많은 글과 말을 아우르는 모종의 공유된 인식틀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그것은 사회적 터부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문화적 무의식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또 다시 대통령이 탄핵되고 조기 대선이 치뤄지려고 하는 한국 사회에 그러한 인식론적 공백이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는 정말 민주주의를 원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의 복잡성과 역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평균적인 문화적 환경 속에서,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곧 권력에 대한 저항과 투표 정도로 이해된다.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는 독재와는 반대되는 개념이자 보통, 평등, 직접, 비밀의 원칙이 지켜지는 투표라는 개념으로 완전히 이해/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기에 무도한 정권을 타도하고, 4개 원칙이 지켜지는 선거를 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는 완성된 것이라는 생각이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에 관한 주류적 관념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개념은 독재 권력 타도와 공정한 선거로만 완성되는 개념이 아니다.
우선 민주주의가 독재 권력과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생각부터 살펴보자.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아닌 현실적인 차원의 민주주의, 즉 제도적 민주주의의 차원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에 의거한다. 일견 다수결의 원칙은 독재 혹은 권력의 독점과 대치되는 것으로 인식되기 쉽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다수결의 원칙에 의거한다면 ’51:49’의 투표 결과의 상황 속에서는 51이 나머지 49의 의사 결정권을 박탈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늘날의 한국 상황이 보여주듯, 사회는 영원히 안정될 수 없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전히 압도하지 않는 이상, 다수결에 의한 결정은 반론, 심지어 반란의 위험성을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에 다수결의 원칙을 넘어서는 정당성과 대의적 차원의 합의라는 요소가 불가결한 이유다. 다수결의 원칙이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권력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정당하지 않은 권력은 항상 비틀거릴 것이고, 오늘날 한국의 상황처럼 특정 정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지 못하는 이상 계속해서 상대 정파의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에 더해 민주주의에는 한 명 한 명의 개별 투표자를 초월하는 모종의 대의와 그것에 대한 공적 합의가 존재해야 한다. 민주주의가 분열 그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며, 민주주의라는 제도 속에서 발생하는 분열은 오히려 그 분열을 통해 이룩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논쟁과 토론의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에 관한 합의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더불어 또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은 결정이냐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는 쉽고 간단하다. ‘중우정치’라는 말이 있듯 많은 경우 다수의 사람이 지지했다고 해서 반드시 올바른 결정인 것은 아니며, 더군다나 바람직한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이 역시 오늘날 한국 사회가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는 바다.
정리해 보면 민주주의에는 다음과 같은 역설과 취약점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민주주의는 반-권력(anti-power)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한편으로는 권력의 남용과 독점을 경계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권력에 의한 ‘결정’, 즉 독재의 순간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이에 더해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초월하는 정당성과 대의에 대한 합의가 필요하다. 어떻게 보면 오히려 이 정당성과 대의에 대한 합의가 다수결의 원칙보다 더욱 근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바, 정당성과 대의는 곧 제도적 차원을 넘어서는 민주주주의 ‘문화적 밑천’인 것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전제를 핵심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인민이 정치 이성을 가지고 있다’라는 전제 하에서만 성립할 수 있다. 만약 인민이 정치 이성을 상실한 상태라면, 민주주의는 망가질 수밖에 없다. 하기에 루소의 말처럼 만약 인민이 정치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것을 갖추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인민의 정치 이성 유무야말로 민주주의에 내재되어 있는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다. 이것은 오랜 시간에 걸친 교육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대내외적으로 존재하는 수많은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변수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좀 더 깊게 들여다 보면, 독재 권력 타도와 선거만으로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거론하는 한국 사회의 인식론적 환경 속에 매우 커다란 결락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반-권력과 정당성 그리고 합의의 문제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는 곧 ‘저항의 역사’다. ‘독재 권력 타도’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핵심인 것이다. 한데 한국 사회는 독재 권력을 타도하는 데 온 힘을 다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내재된 독재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무관심하다. 한국 사회는 최고 권력자가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는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하지만, 정작 건강한 권력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당한 권력의 독점적 권력 행사를 수용하고 이성적으로 평가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인민의 정치 이성이라는 측면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더욱 취약하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즉,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적 준비 과정 없이) 단시간에 인식되었다는 이야기는 차치하더라도, 한국 사회에 제도적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87년 이후) 어느덧 40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이 시간 동안 과연 한국 사회는 인민의 정치 이성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온 것일까? 이 문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정도로 근본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문제이지만, 최소한 한국 사회가 인민의 정치 이성 육성이라는 문제에 소홀했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모든 문제를 차치하고, 현재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내란에 가담했던 후보의 지지율이 30%가 넘는다. 이것은 곧 ‘내란’이라는 개념 자체가 한국 사회에서 거의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거나, 설사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특정한 구조, 즉 분단 상황 속에서 ‘반공이면 무엇이든 타당하다’는 인식론적 구조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 인문사회학계의 상황을 보면, 내란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편이 타당하다고 할 것이고, 분단 구조라는 상황에서 본다면 ‘반공 만능주의’가 작동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측면은 ‘둘 중 하나’가 아닌 ‘둘 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어 결국 한국에는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왕을 뽑는’ 정치 문화가 탄생했다. 여당에 대한 지지와 야당에 대한 지지를 막론하고, 한국의 정치 문화는 ‘대통령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선거가 시작되면 모든 이슈는 ‘누가 당선될 것인가’로 함몰되고, 누군가 당선 되면 ‘독재 타도’와 ‘빨갱이 놀음’이 동시에 펼쳐진다. 어느 당파가 권력을 잡든 상대편의 통치는 ‘독재’가 되고 타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분단 구조에 기댄 세력은 자신이 여당이 되든 야당이 되든 ‘빨갱이 카드’를 손에 쥐고 흔든다.
그렇다면 이 아사리 판 속에서 ‘위대한 국민’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위대한 국민’의 삶은 사실 오늘도 평온하고 즐겁다. 삼삼오오 모여 특정 인물에 대한 평을 마구잡이로 떠들어대고, ‘빨갱이 척살’이라는 국가적 대의를 치켜 들거나, 당장 오늘 하루를 버틸 수 있는 ‘극약 처방’을 기다리면 되기 때문이다. 손에 왕(王)자를 그리고 나온 후보를 뽑은 국민이지만, 그럼에도 국민은 위대하며,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라는 위대한 정치 체제를 그 이유와 정당성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칭송하면 되기 때문이다. 한데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칭송하며 바라마지 않는 ‘민주주의’가 과연 무엇인지 알고 있기는 한 걸까? 아니, 우리는 정말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 것이긴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