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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에 미친 나라_공대에 미친 나라_그냥 미친 나라

by gramscist

몇 해 전부터 ‘의대 열풍’이 불기 시작하더니, 이제 그 정도가 너무 심해지자 슬슬 그것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도 등장하는 것 같다. 언론들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의대가 인기’라는 기사를 쏟아냈고 의대의 인기가 어쨌든 ‘팩트’이기에, 혹자는 그러한 시류에 편승하려 했고, 혹자는 그 시류를 불편해 했으며, 혹자는 그 시류를 묵인하고 있었다. 한데 그 정도가 점차 심해지고 사회적 부작용의 여파 - 산업 전반의 침체와 인재 유출 등 - 가 확대되자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목소리도 점차 힘을 얻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유행하는 말이 ‘공대에 미친 나라 중국’이다.


‘공대에 미친 나라 중국’을 ‘의대에 미친 나라 한국’에 대비하여 공학의 중요성을 설파하려는 시도 자체는 바람직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회적 역량이 의대로 쏠려 균형 잡힌 인재 양성이 저해되고, 그에 따라 근본적이면서도 다차원적인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의 상황을 참고해 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필요한 일이다. 한데 정말 중국은 ‘공학에 미쳐 있는 것일까?’ 그리고 ‘미쳐 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일까?


내 직장 동료는 최근 ‘인재 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고 한다. 제목에서부터 쉽게 예상할 수 있듯 ‘인재 전쟁’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는 중국의 산업 발전에 초점을 맞추면서 중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공학에 ‘미쳐’ 있으며, 그 결과 중국이 ‘산업 굴기’를 이룩해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에 비추어 한국은 ‘의대에 미쳐 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의 핵심 골자다.


동료는 이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가깝게 지내는 중국인에게 물었다. “정말 너희 나라 학생들이 공대에 미쳐 있니?” 한데 중국인의 답변이 의외였다고 한다. “뭐 공대가 인기가 있지만, 미쳤다고까지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공대가 인기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의대도 많이 가고, 순수 학문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많아. 그렇게 ‘미쳤다’는 표현은 좀 과한 것 같아.” 동료의 이 전언을 들었을 때, 나는 그야말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국인은 ‘과잉 본질화’에 쉽게 빠지는 나쁜 습성이 있는 것 같다. ‘~카더라’라는, 모종의 소문이 퍼지면 앞뒤 가리지 않고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인 양 확대 해석하는 버릇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잉 본질화의 습성은 대상으로부터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만드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만들어낸다. ‘중국이 공학에 미쳐 있다’는 다큐멘터리에 대해 중국인이 보인 의아한 반응은 바로 우리 한국 사회가 다시 과잉 본질화의 늪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는 아닐까?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의대 열풍’이라는 현상도 몇몇 언론이 만들어낸 침소봉대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만약 그들 말대로 의대가 블랙홀이 되어 모든 인재가 그곳으로 쏠려 가고 있다면, 우리 나라 공대는 텅텅 비어야 맞다. 기존에 대비하여 많은 수의 학생이 공대에서 자퇴를 하는 것이 사실인 건 맞지만, 여전히 묵묵히 공학을 연구하는 공학도들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언론에서 그러한 공학도들(그리고 여타 학문에 종사하고 있는 전공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공대를 떠나가는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춰 ‘의대에 미친 나라’라는 자기 환상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학문이 공존해야 그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비단 공학만이 아니라, 물리학과 같은 순수 과학도 필요하고, 한 사회/국가의 가치관과 인간관을 다루는 인문사회과학도 중요하다. 한데 한국 사회, 특히 한국 언론은 특정한 흐름이 포착되면, 마치 그것이 모든 것인 양 보도를 하는 것도 모자라, 마치 그러한 흐름에 편승하지 않으면 큰일 난다는 불안감을 조장하기까지 한다.


만약 ‘의대에 미친 나라’를 벗어나 ‘공대에 미친 나라’가 되면 그 나라는 건강한 나라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뻔하다. 그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다. 그냥 ‘미친 나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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