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자로>편에는 다음과 같은 문답이 나온다.
자로가 “위나라 임금이 선생님께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반드시 “이름(명분/호칭/직분)을 바로잡는 것(正名)을 먼저 한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바로 서지 않고(言不顺), 말이 바로 서지 않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며(事不成),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이 서지 못하고(礼乐不兴), 예악이 서지 못하면 형벌이 적중하지 못해(刑罚不中), 백성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民无所措手足)”고 답한다.
공자는 ‘이름을 바로 하는 것’, 즉 ‘정명’의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는바, 그 이유는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연쇄적으로 말과,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결국 사회 자체가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름을 바로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이름을 바로 잡는 것을 요즘 말로 바꿔 본다면 ‘개념을 바로 세운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다. 개념을 바로 잡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심코 쓰는 말의 의미를 바로 새김으로써 우리는 그렇게 바로 잡은 개념을 통해 대상을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 사회는 이 개념을 바로 세우는 것에 둔감하다. 그리고 그와 같은 둔감한 탓에 사회적으로 많은 혼란이 초래되고 있다.
우선 ‘사대’다. 사대라는 개념은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대에 대한 어감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주로 ‘사대주의’라는 말로 사용되는 사대는 ‘대국에 대한 굴종’ 정도로 이해되면서 해당 개념은 한국 사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대라는 개념을 모종의 전략으로 이해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약소국이 강대국에 눈치를 보는 것은 비단 우리만의 일은 아니다.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강대국과 약소국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며, 후자가 전자의 힘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강한 상대방의 눈치를 보는 것은 너무도 일반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매판(買辦)’은 어떨까. 사전을 찾아보면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외국 자본의 앞잡이가 되어 제 나라의 이익을 해치는 일. 또는 그 사람”이 매판의 정의다. 매판은 사대/사대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다. 사대/사대주의는 비록 그 굴종적인 자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전략일 수 있다. 하지만 매판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를 일컫는다.
물론 사대와 매판 사이의 관계는 긴밀하다. 하지만 사대에는 여전히 고려해볼 여지가 있다. 만약 사대라는 행위가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라면 비록 그 굴종적인 정서와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전략적 차원에서 그 행위의 동기를 이해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대가 심해지면 사대주의가 된다.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행동 준칙으로 강화되는 것이다. 당연히 사대주의는 사대보다 위험하다. 큰 나라를 ‘섬기는’ 행위가 상황과 처지에 관계 없이 전략적으로 운용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그러해야 하는 준칙, 나아가 법칙이 되면 그때부터 사대는 전략적 행위가 아닌 아둔하고 무모한 아집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 번 양보해 그 아집마저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그 진정성을 인정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매판은 다르다. 매판은 그 동기에서부터 불량하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매판은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팔아먹는 행위’를 뜻한다. 이것은 단순한 사대/사대주의가 아닌 공동체를 사적인 이익을 위해 팔아 먹는 것이다. 하기에 사대주의와 매판은 한끗 차이다. 공동체의 보존/생존이라는 선을 넘어서는 순간 사대주의는 매판이 된다.
이제 우익/보수 차례다 우익/보수는 원래 있던 무언가, 혹은 기득권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하기에 우익/보수는 기존의 권력 관계를 지키려는 집단 혹은 사람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하지만 이 ‘기존의 권력 관계를 지킨다’라는 것 역시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익/보수라는 개념에 어울리지 않는다. 오직 사적인 목적을 위해 기존의 권력 관계를 지키고자 한다면 그것은 결국 ‘파벌’에 불과하다. 우익/보수라는 개념에는 분명 공동체를 위한 염려와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공동체의 이익을 도외시한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한 기득권 수호에는 우익/보수라는 개념이 어울리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매판 세력이 우익/보수 세력으로 둔갑했다. 친일파가 우익/보수로 옷을 갈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이와 같은 둔갑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숨겨 왔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사대주의, 매판, 우익/보수가 뒤엉켜 사용되고 그와 같은 개념적 혼란 속에서 누가 우익/보수이고 누가 매판인지 구별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사대/사대주의, 매판, 그리고 우익/보수가 ‘공동체를 위함’이라는 근원적인 동기에 의해 구별되는 것임을 인식하면 한국 사회를 괴롭혀 왔던 개념적 혼란은 다소 정리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공동체를 위한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보수/우익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공동체를 팔아 먹는 매판과는 다른 개념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됨으로써 보수/우익과 매판을 구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준거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광화문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나부낀다. 광장에 모여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사대주의자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우익/보수라고 주장한다. 나는 광화문 광장에 모여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들어대는 사람들 ‘모두’가 매판 세력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들은 그저 사대주의자들일 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매판 세력에 의해 조정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매판 세력은 아마 광장에 있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어딘가에서 조종 당하고 있는 사대주의자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킬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지키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우익/보수라고 명명하는 비극 역시 안타깝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딘가에 숨어 있는 매판 세력을 색출해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사대/사대주의 그리고 우익/보수와 매판을 근원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기준점을 알려주고 그들의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함께 나부낄 수 있지만, 그것은 오직 성조기가 태극기의 보존과 생존을 위할 때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비로소 매판 세력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