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그 거대한 미스매치의 현장에 관하여

by gramscist

미스매치(mismatch)라는 말의 뜻을 쉽게 풀어보면, 그것은 결국 무언가 서로 잘 맞아떨어져야 하는 두 대상이 그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대학’이라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 ‘미스매치’라는 단어가 단순히 경제학에서 이야기하는 양적 불일치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 다루려고 하는 대학의 ‘미스매치’는 결국 ‘요구하는 것’과 ‘공급하는 것’ 사이의 질적 불일치, 다시 말해, ‘학생이 요구하는 것’과 ‘대학이 공급하는 것’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대학이 공급하는 것’의 차원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언젠가부터 교수들 사이에서 ‘공부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말이 심심찮게 회자되기 시작했다. 이 말이 품고 있는 ‘기의’는 자못 의미심장한데, ‘공부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말의 뒷편에는 꽤 중층적이면서도 복잡한 맥락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공부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말에는 ‘교수에게 있어 공부/연구는 그저 개인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차피 연구는 사적인 차원의 행위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내뱉는 대화의 맥락을 잘 살펴보면, 결국 오늘날 대학에서 연구/공부의 의미가 ‘승진을 하기 위한 개인적 차원의 일’로 축소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차피 연구/공부(특히 인문사회과학계에서)는 승진을 위해 수행하는 개인적 차원의 ‘숙제 비슷한 무엇’ 이상의 의미를 부여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따라 나온다. ‘만약 연구/공부가 (특히 인문사회과학계에서) 개인적 차원의 숙제에 불과한 것이라면, 사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공적인 차원의 과업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오늘날 대학 교수가 수행해야 하는 ‘공적인 차원’의 과업은 ‘사업’이다. 대학에 몸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사업’의 의미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오늘날 한국 대학에는 ‘사업’이 넘쳐난다. 대학이 수행하는 이 ‘사업’은 국가, 좀 더 정확히 말해 교육부가 내려주는 사업을 가리킨다. 최근의 글로컬 사업을 비롯해, 라이즈 사업, BK21사업, HK사업, 에이스 사업 등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업’들이 존재한다. ‘어차피 연구/공부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는 말은 바로 대학에서 교수가 수행해야 하는 좀 더 중요한 일이 이러한 ‘사업’에 참여/투신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바로 여기에 대학 측에 내재되어 있는 자기 모순적 ‘미스매치’가 존재한다. 어차피 연구 역량은 임용과 승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논문과 저서를 쓰고 심지어(!) 번역을 하는 모든 의미는 ‘승진’으로 ‘환산’될 수 있다(혹은 되어야 한다). 하기에 연구/공부는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사적인 과업’이 되는 것이다. 한데 ‘공’은 ‘사’보다 중요하다. 더군다나 오늘날 한국 대학의 상황 속에서 ‘사업’이라는 공적인 과업이 ‘연구/공부’라는 사적인 차원의 과업보다 더욱 커다란 규모의 ‘자본’을 가져오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사업’이 ‘연구/공부’보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대학 자체의 미스매치를 만들어낸다. 만약 ‘어차피 연구/공부는 개인적 차원의 과업일 뿐’이라면, 왜 굳이 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교수를 선발/평가하는가? 이 모순적인 질문에 대해 한국 대학이 내놓은 어설픈 답은 연구 성과를 논문 편수로 환산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다. 어차피 연구 역량은 그저 절차상의 문제일 뿐이기에, 그것의 질(quality)과 관계 없이, 논문 수(그것도 ‘영어’ 논문 수)를 점수로 환산해 교수 선발과 승진이라는 형식적 과정의 객관적 지표를 마련하면 그뿐이다. 선발 과정이 끝나고 나면, 나머지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하는 것’이 된다. 승진을 위해 논문을 생산하고 - 그 질은 아무도 알 바가 아니거나, 좀 더 겸손하게 표현해 누구도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 것이다 - 승진 점수를 채우면서 동시에 ‘사업’에 참여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학은 연구 기관인가 사업 기관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가장 행복한 답안은 세 번째 일 것이다. 연구 기관인 동시에 사업 기관이면 그보다 좋을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입장에서는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연구에 집중하고 싶긴 한데, 사업 참여를 안하자니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사업에만 집중하면 승진 점수를 채우기 힘들 것 같고….’ 그나마 국립대 교수는 어느 정도 주체적인 선택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으나(국립대 교수마저 그 ‘주체적 선택’으로 인한 어느 정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의 경우 결국 교수는 둘 다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에 따라 가장 현실적인 선택은 ‘승진’이 가능한 정도의 연구’만’을 진행하면서 나머지 시간을 사업에 투자/할애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선택에 의해 대학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될까? 한동안 한국 대학에서는 ‘최고의 연구자가 최고의 교수자가 된다’는 공식이 인정 받았다. 다시 말해 연구 역량이 탁월한 사람이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데 앞서 말한 구조 속에서 ‘최고의 연구자=최고의 교수자’라는 공식은 붕괴될 수밖에 없다. 연구는 승진을 위한 사적인 차원의 과업일 뿐이며, ‘사업’이 더욱 큰 규모의 자본을 유치하는 길이라면 대학의 입장에서 굳이 ‘최고의 연구자’를 모실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사업 계획서 잘 쓰는 ‘최고의 사업가’야말로 ‘최고의 교수자’가 아닌가.


실제로 한국 대학에서는 그런 일이 착착 진행 중이다. 이제 더 이상 대학은 최고의 연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어차피 연구 역량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 그리고 사실 인문사회계열의 경우 한국 대학은 누가 우수한 연구자인지를 깊이 있게 고민/검증하는 장(field) 자체가 없었다 - 그저 편수로 수치화된 연구 역량 정도를 갖췄다면, ‘사업’에 투신할 수 있는 사람이 더욱 훌륭한 교수 자원이 된다. 간단히 말해 ‘일 잘할 것 같은 사람’이 더욱 훌륭한 후보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학생 차원에서 바라본 미스매치를 살펴보자. 언젠가 내가 다니는 대학의 ‘에브리타임’에는 한 학생의 글이 게재되었는데, 그 학생은 후배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취업 관련 정보를 얻으려면 차라리 취업 잘한 선배를 찾아가는 편이 낫다. 어차피 교수들은 우리와 인생 트랙 자체가 달라서 취업 관련 정보를 얻는 데 한계가 있다.” 이 글만큼 오늘날 한국 대학의 미스매치를 잘 대변해주고 있는 글이 있을까.


언젠가부터 대학에 주어진 역할은 ‘취업’이었다. 한국에서 대학에 가는 이유는 아주 오랫 동안 - 어쩌면 한국 대학의 역사 내내 - 부와 명예의 창출이었다. 한데 과거에는 자본이 팽창했고 대학생이 되는 것이 어려웠기에 ‘대학=취업=부의 창출’이라는 공식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 한데 2000년대 이후 그러한 공식은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학은 자신의 역할을 취업에 집중시켰다. 대학 스스로 ‘취업’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고 자처했고, 학생들에게도 '취업' 이외의 것에 관한 시그널 송출을 축소/중단시켜 버렸다.


사회가 ‘취업’을 요구했고, 대학이 그것을 그대로 수용했기에, 학생이 대학에 바라는 것 역시 ‘취업’이 되었다. 한데 그렇다면 과연 대학은 취업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일까? 한 번 생각해 보라. 글로컬 사업이, 라이즈 사업이, 에이스 사업이, 무슨 무슨 사업이 과연 취업 문제를 해결했는가? 그런 사업을 통해 학생들이 취업에 관한 지식을 얻었는가? 더군다나 취업과는 관계 없이 자기 전공 분야의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수년 간 노력했던 사람들이 주도하는 그 ‘사업’이 학생들의 취업에 정말 도움이 되는 것일까? 그야말로 기괴한 미스매치다.


이에 더해 오늘날 ‘취업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우문이 되어 버렸다. 왜? 도대체 ‘취업에 필요한 지식’이 무엇인지 대학도, 기업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인공 지능의 시대가 된 이 마당에 과연 무엇이 취업에 필요한 지식인지 누가 정확히 답해줄 수 있는가? 인문사회과학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제 공학마저도 인공 지능이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그렇다면 취업에 필요한 지식인 무엇일까?


이렇게 오늘날 대학은 거대한 미스매치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 미스매치는 연구가 아닌 사업을 잘 하는 교수를 연구 실적으로 선발/평가하면서도, 정작 그 연구 실적과 사업이 과연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답을 구할 수 없는 어정쩡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거대한 미스매치의 현장을 바라보면서 나는 결국 대학의 생존은 연구/공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선 ‘취업’이라는 차원에서 대학의 역할은 끝났다. 피터 틸이나 알렉산더 카프 같은 이들이 노골적으로 말했듯이, 대학이 ‘취업’에 관한 지식을 제공해주는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에 관한 단편적 지식’은 교수가 아니라 인공 지능이 얼마든지 제공해줄 수 있다.


또한 ‘사업’을 수행하는 대학이라는 개념은 사실 국가 기구가 만들어낸 관료주의적 환상이다(또한 그것은 관료 기구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앞서 나열한 무슨 무슨 사업이라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취업인데, 이미 취업 시장의 전반적인 추세는 관료 기구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속도와 강도로 변화하고 있다. 더군다나 한국과 같이 극도로 경직되어 있는 형태의 지원 방식은 그저 예산을 공중에 흩뿌리는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예컨대 정부에서 대학에 전달되는 지원금으로는 학생들에게 책 한 권 사줄 수 없다. 이유인즉슨, 책이 학생 개인에게 ‘사적으로 소유’되기 때문이란다).


결국 단편적인 지식을 모두 인공 지능이 처리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 인간에게 남는 선택지는 하나다. 그것은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앞으로의 일은 장담할 수 없지만, 최소한 아직까지는 인공 지능이 인간의 질문을 선취하지 않는다. 결국 인공 지능을 구동시키는 것은 인간의 질문인 것이다. 하기에 대학은 질문을 생산하는 곳이 되어야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의 한국 대학은 20세기의 유산과 21세기의 과제가 그 이유도 모른 채 어색하게 한 공간 속에 앉아 있는 어정쩡한 공간이 되어 버렸다. 다만 두려운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앞에서 말한, 대학이라는 거대한 미스매치의 공간을 만들어낸 무지와 나태가 앞으로도 계속되지는 않을까라는 불안감이 엄습하기 때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대/사대주의, 매판, 그리고 우익/보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