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침식된 자
AF, 하르켄의 죽음
상준은 굳게 입을 다물고 전방을 노려보았다.
동쪽에서 10만 마리의 에피머 군단이 도시의 건물을 가르며 쇄도해 왔다.
무감정한 표정의 휴머니스 간부와, 그 옆에 불길한 기운을 뿌리고 있는 정체 모를 개체들.
그들이 뿜어내는 검은 아우라는 이미 주변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저… 저건 뭐지. 휴머니스 간부는 알겠는데, 옆에 있는 것들은 뭐지?”
“에피머가 10만 마리? 역대급 규모야.”
팀원들이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머리에 달린 촉수와 사슬 갑옷을 연상하게 하는 피부. 우리가 상대해 본 적 없는 생명체다.”
하르켄의 목소리는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혼란이 담겨 있었다.
그들의 외형은 뱀파이어처럼 압도적인 공포를 주는 모습이었다.
“팀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들의 정체는 블랙 셀에 침식된 자, 정확히는 인간이었던 존재입니다.”
차상준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인간이었다고요? 블랙 셀은 또 뭐예요?
그리고, 저렇게 무서운 외형은 대체 어떻게 된 거죠?”
민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쉬지 않고 물었다.
“그것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오염된 셀의 영향이야.
그 영역에 닿은 자들은 이성과 영혼을 잠식당하게 돼.
지금 저들은 명령을 따르는 전투 병기라고 보면 된다.”
상준의 목소리는 냉정했지만 그 속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간단한 설명을 부탁하마.”
EQ : 그건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휴머니스 간부는 주술, 비술, 진법 등을 섞어서 만든 심연술을 익혔습니다.
앞에 보이는 간부는 9위 간부 드라간입니다. 2~4등급 예상.
부정적 에너지를 수집하고 그걸 이용해서 심연술을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휴머니스 지도자는 AID 5급의 링크 같이, 신호 동기화 같은 능력을 보유했다고 봅니다.
상준이 물었다.
“주술이라는 게 있었어?”
EQ : 휴머니스 포로에게 구한 정보예요.
가족의 안전을 보장하고 얻은 정보니 거의 확실합니다.
“아니 그런데, 왜 이런 정보를 지금에서야 알려주는 거야?”
EQ :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인 누락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돼요.
“뭐야? 그럼 우리 쪽에 역시 스파이가 있다는 건가?”
EQ : 최근 데이터를 보면 작전의 실패율이 높아지고 희생이 늘었어요. 아마도…
“에라이. 일단 방어 끝나고 다시 얘기하자.”
EQ : 몸조심하세요.
휴머니스 진영.
휴머니스 친위대 9위 드라간.
그의 귀에는 휴머니스 최고 지도자 김철민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드라간. 적어도 뉴욕과 자유의 여신상은 지도상에서 없애라.”
“네. 지도자님.”
“이번에 AEC(Anima Energy Conversion : 영혼 에너지 수집 안테나) 설치는 완벽하겠지?”
“뉴욕의 부정적 감정은 AF(Anima Factor : 영혼 인자)를 가득 차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거기서 얻은 AF는 전부 EP-코어로 응축시킨다.”
“저희 AF 경험치를 올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에피머 군단을 조금 더 늘리는 방향으로 간다.”
“잊지 마라 드라간. 아바돈 셀이 창조와 물질의 근원이라면
우리 AF는 파괴와 왜곡의 근원이다. 파괴된 지구라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신나게 한번 날뛰어 보지요.”
“믿겠다.”
드라간은 정면에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았다.
로봇들과 현대 병기들로 무장한 군인들.
“훗…, 초급 진법 현현!”
AF 3급의 소규모 공간 주술이 에피머 알파들에게 펼쳐진다.
알파들의 눈이 피처럼 붉어지며,
각기 1,000마리의 에피머를 데리고 전열의 선두에 섰다.
콧김이 사방으로 퍼지는 것을 보니 아마도 버프 계열의 주술인가 보다.
무감정한 눈빛의 드라간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짓 하나에 약 10만 마리의 에피머들이 굶주린 맹수처럼 일제히 울부짖기 시작했다.
그들의 사기가 정점을 찍을 무렵, 들었던 손을 내리면서 적들의 돌진이 시작되었다.
“어센던트는 적들의 중심에 모든 화력을 투사하라.”
드미트리의 명령이 떨어졌다.
Ascendant : 어센던트 명령 확인!
주포 2문 : 플라즈마 캐논 발사.
부포 8문 : 미사일 포드 순차 사격 개시.
코드-02 : 100기 동시 사출.
셀 보호막 가동.
어센던트는 투명한 방어막을 치고,
대기를 찢어발기는 공격을 시작했다.
기이이이 잉- 지지직! 두와아앙!
곧이어 코드(-02 : 공격용 드론) 100기가 벌떼처럼 날아올랐다.
츠츠츠츠…. 윙윙
“뉴욕 자치부대는 덩치가 큰, 알파 에피머들 위주로 견제하고
제라프 1, 2팀은 침식된 자들을 상대한다.”
하르켄도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콰아아아 앙. 콰아아 앙.
뉴욕 상공을 지키던 어센던트의 공격이 바로 앞에 있는 에피머에게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옆에서는 2m가 넘는 코렉들이 전자총과 셀렉션을 휘두르며 전진했고,
저고도에서는 눈이 부실 정도의 전자 미사일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일제히 화력 쏟아낸 공격은 에피머 군단의 선두를 일시적으로 지워냈다.
하지만 10만의 군세에 그 정도의 손실은 단지 찰나의 희생일 뿐이었다.
흑색 파도는 멈추기에는 부족한 화력이었다.
“좋아, 한번 붙어보자!”
“알렉스 사단장은 코렉(지상형), 코드(드론형) 전 기체 전진배치.”
“확인했습니다. 코렉, 코드 전진 배치!”
뉴욕 자치부대 브루클린 방어선.
위쪽에 치열한 싸움과 비등할 만큼, 쉴 새 없는 공방전이 펼쳐졌다.
에피머는 동쪽의 롱아일랜드에서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다.
“지겨운 새끼들. 좀비 영화는 귀여웠구나…”
2 팀장 빅토르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스톰 브레이커 부팀장이 소리쳤다.
“팀장님 집중하십쇼. 스톰 브레이커!
화력 집중. 적의 콧등을 무너뜨려라.”
“진작에 코바를 전투용으로 개조했으면 이렇게 밀리진 않을 텐데.”
“그랬으면, 지구의 주인이 인간이겠어요?”
“크흠..., 특무대 지원은 없나? 이거 너무 밀리는데?”
“아이 팀장님아. 말할 시간에 총이나 쏴요.”
“요즘 애들은 이래서 안 돼. 키워줘 봐야 소용없다니까?”
“아오. 총알이 팀킬이 안 되는 게 한이네요.”
브루클린 방어선은 맹렬히 몰아치는 파도 앞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침식된 자들은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6명의 인원이 어센던트의 폭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번개처럼 2팀에게 다가왔다.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2팀을 집어삼켰다.
“젠장. 저놈들은 내가 막는다.”
제라프 본부장 드미트리가 브루클린으로 지원을 갔다.
“파이어 레인은 상준 부팀장 옆에서 간부에게 집중해.”
하르켄도 급하게 지원을 나가며 명령을 내렸다.
하르켄과 드미트리는 셀 에너지를 응축시킨 기의 칼 ‘셀렉션’을 꺼냈다.
푸른빛이 칼날을 휘감으며 선두의 침식된 자의 심장을 겨냥했다.
스르릉 스캭! 삭삭삭! 챙. 카앙! 카앙!
셀력션의 칼날은 침식된 자의 몸통에서 금속음을 내며 튕겨나갔다.
‘공격이 안 먹힌다?’
상대는 합금처럼 강한 기다란 손톱으로 손목을 노렸다.
피부가 스칠 정도의 간발의 차, 하르켄은 낙엽처럼 몸을 비틀어 빠져나갔다.
“스톰 브레이커. 엄호 사격. 침식된 놈들을 묶어!” 팀장 빅토르가 소리쳤다.
스톰 브레이커 팀이 동시에 셀 에너지 강화탄을 침식된 자들에게 쏟아냈다.
푸른 섬광이 터졌지만 침식된 자들은 마치 어둠 속의 환영처럼 그 섬광을 튕겨냈다.
공격은 무력했다.
“젠장. 저놈들의 방어력이 문제가 아니야.
뭔가가 물리 법칙을 비틀고 있어!”
그 사이 측면의 침식된 자 둘이 동시에 움직여 하르켄의 전술 슈트를 강타했다.
콰아앙!
하르켄의 방어구는 산산조각 났다.
하르켄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검은 촉수에 양쪽 어깨가 꿰뚫려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순식간에 그의 온몸이 검게 물들어 갔다.
오염된 물질이 그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르켄은 갑자기 몹쓸 병에 걸린 듯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드미트리는 하르켄을 도와주려다가 측면에서 침식된 자들 셋에게 기습당했다.
그의 몸은 여섯 개의 촉수와 발톱에 고슴도치처럼 찔렸다.
그는 이 상황에서도 하르켄에게 조금씩 다가가려고 했다.
침식된 자들의 얼굴에 비웃음이 어리더니 이내 사정없는 공격이 이어졌다.
하르켄을 찔렀던 자는 드미트리 쪽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고,
하르켄의 몸을 든 채 2 팀장 빅토르를 향해 조롱하듯 걸어왔다.
“이것이... 힘의 차이다.”
푸슉.
침식된 자가 암흑의 단검을 생성시켜 하르켄의 심장을 꿰뚫었다.
“크윽...! 상준... 들어. 고마웠다. 꼭 살아남아라...”
하르켄의 눈빛은 마침내 완전히 꺼졌고, 그 몸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르켄의 죽음은 방어선 전체에 충격파를 던졌다.
전열의 병사들은 에피머를 보고도 총을 쏘지 못했다.
사기가 붕괴되었다.
휴머니스 간부 드라간이 수정구를 치켜들었다.
에피머 군단이 다시 울부짖으며 속도를 높였다.
지도자 김철민의 원격 지배가 더욱 강하게 전장에 드리워졌다.
EQ : 마스터! 특무대가 곧 도착합니다. 조금만 버티세요!
“…”
전술 헬멧 너머로 들려오는 EQ의 목소리가 웅웅 거린다.
푸른 불길.
눈에서 시작된 그 불길은 바닥에 문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셀존은 내적압축…’
‘AID는 외적폭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어금니를 깨물던 상준의 눈이 진한 파란색으로 변해갔다.
그는 점점 AID 등급을 높여갔다.
파지직. 파지직. 슈파아아악!
깨알같이 적힌 기이한 문자가 원을 그리며 도형이 완성되었다.
그의 몸을 감싼 푸른 에너지는 마치 살아있는 불꽃처럼 춤추며 폭발적인 아우라를 뿜어냈다.
이 아우라는 침식된 자들이 뿜어내는 검은 기운과 충돌했다.
상준은 죽은 적의 AF가 간부에게 흡수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AF를 흡수해서 성장하는 방식인가…’
어쨌든,
“네놈들... 전부 죽여주마.”
상준의 몸에서 터져 나온 아우라가 에피머에게 닿자 지배력이 교란되었다.
그것을 본 침식된 자들이 일제히 경계심을 드러냈다.
스팟.
순간 차상준의 몸이 사라졌다.
사사삭… 사사삭…
침식된 자들의 눈에는 상준이 점멸하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반복했다.
그는 침식된 자 둘의 목을 잡고 비틀어 버렸다.
파지직.
침식된 자들을 감싸고 있던 주술력이 일제히 희미해졌다.
상준이 뿜어낸 순수한 셀 에너지가 AF를 완벽하게 무효화시킨 것이다.
차상준은 하르켄의 셀렉션 파편들을 재결합시킨 거대한 푸른 검을 움켜쥐었다.
“셀 코어에 도달하지 못한 불쌍한 놈들.”
차상준은 나머지 넷을 향해 달려갔다.
그의 푸른 검이 목 뒤쪽을 찔러 들어갈 때마다, 모래처럼 사라졌다.
6명의 침식된 자들이 찰나의 섬광 속에서 모두 소멸했다.
상준은 주먹을 쥐고 그 자리에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아!!!!!!!
함성에 맞춰 셀 파동이 파도처럼 뉴욕 전역에 퍼져나갔다.
“빌어먹을. 저놈은 대체 무엇인가.”
드라간의 표정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원격 지배 신호가 완전히 끊어졌고, 에피머 군단은 이미 통제 불능 상태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에피머들이 멈췄어.”
한 병사의 외침이 전장에 퍼졌다.
“공격! 에피머들을 몰아내라.”
동현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드라간은 패배를 인정했다. “후퇴한다.”
침식된 자 4명과 알파들은 그의 뒤를 따라 전장을 이탈했다.
버려진 에피머들은 지휘 체계를 잃고 광기에 찬 짐승들이 되었다.
“녀석들을 처리해라.”
상준의 외침에 팀원들이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수아는 손을 떨고 있었지만 상준의 푸른 등에 시선을 고정하며 총을 들었고, 에밀리 챈과 민준, 동현도 질 수 없다는 듯이 달려 나갔다. 눈빛이 살아난 것은 윌리엄, 오스카, 세르게이, 리온도 마찬가지였다.
상준의 지휘 아래 뉴욕 자치부대는 패주 하는 에피머를 사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