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적인 여행을 선호하지만, 여행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해 계획이 바뀌기도 하고,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일정을 즉흥적으로 바꾸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새로운 만남을 만든다. 새롭게 만나는 멋진 풍경들, 맛있는 음식들 혹은 좋은 사람들까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행복은 계획된 행복을 뛰어넘는다.
천사의 성 야경
야경
그날의 야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 로마. 나는 한인민박에서 진행하는 야경투어를 끝내고 일찍 잠에 들 예정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는 빡빡한 일정을 위해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숙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는 너무나도 즐거웠고, 우리의 대화는 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렇게 시간은 10시, 11시... 12시를 넘어가고, 친구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다음날 일정을 위해 하나둘씩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새벽 1시. 처음 만난 3명의 남자만이 자리에 남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대화의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대화의 마지막 주제만은 확실하다. 바로 야경. 우리는 마지막으로 숙소에서 진행했던 야경투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가 봤던 바티칸과 천사의 성, 이 두 야경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에 대해서.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로마까지 왔는데 콜로세움의 야경을 못 보고 돌아간다고?'
아쉬웠다. 물론 바티칸의 야경도, 천사의 성의 야경도 모두 아름다웠지만, 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의 야경을 못 보고 돌아가는 것이 아쉬웠다.
만약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 로마의 야경을 보러 올 기회가 있을까? 분명 쉽지 않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이 일에 대해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봤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음이 분명했다.
'아쉽다고? 후회가 될 거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보러 가야지!!'
갑작스럽게 결성된 3인의 야경 파티. 로마의 새벽, 우리는 숙소를 나섰다.
숙소에서 진행한 야경투어. 돌아오는 길. 10년 전 스마트폰의 한계
작은 공원
콜로세움을 위해 출발한 제2차 야경투어는 숙소 옆에 위치한 작은 공원에서 시작됐다. 콜로세움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공원은 너무 어두웠다. 가로등은 허우대만 멀쩡할 뿐, 조명은 온데간데없었다. 거기에 얼핏 보이는 허름한 유적들이 합쳐져 공원의 모습은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산했다. 솔직히 혼자였다면 지나갈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명, 이런 분위기는 오히려 우리의 투어를 즐겁게 만들었다. 공원이 어두운 만큼 그 안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어딜 가나 사람이 넘쳐났던 낮의 로마와 다르게 공원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락카로 그림을 그리던 거리의 화가들, 거리를 돌아다니던 관광객들, 그리고 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던 현지인들까지... 공원에는 오직 우리만이 남았다.
우리는 그 거리를 즐겼다. 아마도 즉흥적인 야경에 대한 설렘이 대부분이었겠지만, 조용한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차분한 대화들과 새벽의 시원한 공기는 이 설렘을 더욱 끌어올렸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는 단지 여행지를 걸으며 대화만 이어갈 뿐임에도, 그 자체만으로 여행이 얼마나 즐겁고 설렐 수 있는지 보여준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랬다. 여행지를 걸으며, 무언가를 향한 설렘과 적당한 대화들은 마치 영화 속의 모습과 같았다. 물론 영화는 썸이고, 우리는 남자 셋이었지만...ㅎㅎ
아쉽게도 공원 사진은 남아있는 게 없다. 그래서 콜로세움
콜로세움
가끔 그럴 때가 있다. A를 생각하며 왔는데, 의외로 B가 더 좋았던 순간. 콜로세움의 야경이 딱 그런 모습이었다. 물론 콜로세움만으로도 완벽했다. 거대한 원형의 경기장과 수많은 문을 비추는 조명은 말 그대로 완벽했다.
그러나 우리를 사로잡은 것은 콜로세움이 아우러진 그곳의 풍경이었다. 콜로세움은 단지 시선에 들어온 풍경의 일부에 불과했다. 거대한 콜로세움 뒤로 개선문이 보였고, 하늘에는 선명한 보름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구도가 좋았다고 해야 할까? 시선의 한편을 콜로세움이 가득 채우고, 반대편을 개선문과 보름달로 마무리하는 구도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웠다.
개선문과 보름달, 이 옆으로 콜로세움이 보인다.
야경의 끝
콜로세움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후에도 우리는 로마를 걸었다. 조명이 없어 분간이 어려웠던 대전차 경기장을 지나고, 오렌지 공원에서 로마의 전경도 구경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사단의 열쇠 구멍 너머 바티칸 대성당의 모습을 보며 우리의 야경 투어를 마무리했다.
솔직히 손에 꼽을 정도로 대단한 야경이었냐고 물어본다면 그렇지는 않다. 꽤 좋은 야경이었지만, 이후 여행을 다니면서 더 좋았던 야경들도 많다. 그러나 여행의 분위기만큼은 로마가 최고였다. 여행지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분들과 함께 하는 생각지도 못한 여정은 여행의 설렘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줬다.
만약 숙소의 마지막 대화에서, 일정에 묶여 있었다면 공원과 밤풍경, 설렘들은 모두 없었겠지... 그러나 우리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떠났고 후회하지 않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