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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Jul 16. 2022

형제의 일본 여행기 (1)

일본 사람은 과거사를 이야기하면 반일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은 과거사를 이야기하면 반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사람은 과거사를 이야기하면 반일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


 띠 동갑으로 12살 터울인 70세의 형님과 함께 일본 여행을 떠났다. 

예전에 아버지가 형제들과 의좋게 해외여행을 다니시며 즐거워하시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형제와 아버지 형제처럼, 형제가 함께 여행하며 우애를 나누는 전통이 대를 이어 우리 아들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형님은 일본과 중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셔서 한중일 관련 문화와 역사에 대해 해박하다. 그래서 형님하고 종종 일본 여행을 함께한다. 메이지 유신의 산실이었던 사쓰마(薩摩, 가고시마)와 조슈(長州, 하기) 지역 등을 형님과 함께 방문하였고, 이번이 네 번째 형님과 동행하는 일본 여행이다.  이번에는 고대 일본과 관련이 있는 와카야마(和歌山) 지역을 찾았다. 


 간사이 공항에서 차로 와카야마 구마노(熊野)로 향했다. 일본의 초대 덴노(천황) 진무(神武)는 가고시마에서 당시 일본의 중심지인 나라 분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와카야마 반도 남단의 구마노에 상륙하였다. 나라 분지까지는 첩첩 산길이었다. 진무와 원정 군사들은 첩첩산중에 가로막혀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 신화에 의하면 정벌군이 어려움에 처하자 다리가 세 개인 까마귀, 즉 삼족오(三足烏)가 앞장서서 길안내를 하였다고 했다. 삼족오의 도움으로 진무 일행은 산과 산을 넘어 나라 분지가 내려다보이는 지역에 도착했다. 나라 분지의 토착 거주민들이 방심하고 있을 때 기습공격으로 항복을 받아 진무는 야마토(大和) 왕국을 건국하고 초대 천황이 되었다는 신화이다.


 사극을 보면 종종 삼족오를 볼 수 있다. 고구려의 주몽이나 백제의 무령왕, 발해의 대조영을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 나오는 깃발에 삼족오가 등장한다. 일본 건국설화를 고고학적으로 해석하면 백제계의 무리들이 삼족오 신앙을 가지고 일본에 건너가 고대 일본을 건국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번 여행은 삼족오 신앙을 가지고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 건국의 아버지들 (founding fathers)이 처음 도착한 가고시마에서 나라 분지를 정복하여 고대 일본을 건국한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일본 축구 대표 선수의 유니폼에도 삼족오가 보인다. 두 다리는 지면을 밟고 있고 또 하나의 다리는 축구공을 밟고 있다. 예전에 일본 친구에게 왜 삼족오를 축구 대표팀 상징마크로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 친구의 대답은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발이 세 개면 두 발 보다 공을 더 잘 찰 수 있지 않을 까?’라고 웃으며 말했다. 뭔가 석연치 않았는데 구마노에 와서야 그 비밀이 밝혀졌다. 


 구마노에 오니 곳곳에 삼족오 깃발과 기념품이 보인다. 삼족오를 모시는 신사도 보였다. 삼족오는 일왕의 전통 예복에도 보인다. 삼족오 문양은 천황가의 상징이기도 하다. 퇴위를 선언한 현재의 덴노(헤이세이)는 자신과 일본 천황가에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였다.


 문명 연구가인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한국과 일본을 유년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로 비유한다. 하지만 유년기인 고대사부터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 두 나라는 서로 으르렁대기 바쁘다. 임진왜란과 한일합방, 그리고 1990년 대 후반 IMF 위기를 맞기 직전에도 한일 간 감정의 골은 깊었다. 


 김영삼 대통령이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하여 일본이 크게 반발했다. 일본의 총리가 ‘독도는 우리 땅이다’라는 망언에 대한 대응이었다. 우리는 그럴 방법도 딱히 없는데 상대방 국가에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고 모욕만 주고 말았다. 오히려 일본이 ‘두고 보자, 저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을 테니….’하고 벼르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한국이 어려워지자 일본은 빌려준 자금을 연장해주지 않고 제일 먼저 회수하여 외환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었고, 급박한 순간에 한국 정부는 IMF에 가지 않으려고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냉정하게 거절당하였다.


 2015년 초, 일본 동경에 있는 국제기구에 부임했을 때도 두 나라의 사이는 얼음골처럼 냉각되었다. 이 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먼저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올 필요 없다.’라는 발언은 일본을 자극했다. 일본은 ‘일국의 리더로서 예의가 아니다’라고 총리가 반박하는 등 거칠게 반발하였다. 


그 여파로 당시 일본을 휩쓸었던 한류의 바람은 순식간에 지워졌다. 케이팝의 인기는 물론, 회식을 하면 한국식 고기구이 집이나 소주와 막걸리가 인기였는데 그런 경향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동경 신주쿠에 한국인 가게가 밀집한 신오꾸보가 서울의 명동거리처럼 한류 영향으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는데, 주말마다 신 오꾸 보 거리에서 벌어지는 우익들의 혐한 데모로 손님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매출도 급격히 줄어 줄줄이 가게 문을 닫게 되었다.


 대체로 일본 사람은 한국사람이 과거사를 이야기하면 ‘이 사람은 반일이구나’라고 생각한다. 한 일본 친구가 진지하게 물었다. “왜 한국사람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 삼은 것에 그토록 분노하나? 문제는 있었지만 그래도 그 덕택에 한국이 근대화된 게 아닌가? 일본이 조선을 합병한 뒤 철도와 도로, 학교를 지어준 혜택으로 조선은 잘 살게 되었고, 위생 수준도 높아져 인구도 늘었다. 이것은 팩트이고 고마운 일인데 왜 원망만 하나?” 


 일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생각이 들 법도 하다. 일본 친구에게 답하기를, 한국이 잘 살게 되었으니 그 점은 고마워해야 되는 게 아니냐 하는 인식은 한국사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했다. 예를 들어 몹시 가난한 집의 얌전한 처녀를 건달이 납치하여 자기 여자로 만들고, 밥도 먹이고, 좋은 옷도 사주었다 하자. 그것을 두고 그 여인이 잘 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나? 그 처녀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납치한 건달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느냐고 되물었다.  


(다음 편에 계속)




(일러스트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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