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애리수가 부르는 황성 옛터를 관객들은 울먹이며 함께 불렀다.
극단은 하루 종일 어수선했다. 김현 단장은 이틀 전부터 출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취성좌의 재정이 악화되어 돈을 구하러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단원들은 다음 무대에 올릴 ‘동방이 밝아온다’의 연극 연습을 중단한 채 삼삼오오 모여 극단의 장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취성좌가 망하게 생겼다던데.”
“설마, 그런 일이......”
“오늘도 단장이 출근을 못했잖아. 채권자들이 잡으러 올까 봐 몸을 피한 거래.”
여러 가지 생각에 어수선한 마음을 다잡고 연극 연습을 하고 있는데, 극단에 여러 명의 건장한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단장은 어디에 숨어있는 것이야!”
단장을 찾아내라고, 한바탕 극단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그들이 떠나고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야 단장이 초췌한 얼굴로 극단에 나왔다. 궁금해하는 단원들에게 단장은 입을 열었다.
“이자가 원금보다 늘어나고, 빚이 빚을 불렀어.”
단장은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한 단원이 단장에게 물었다.
“그럼, 우리 월급은 어떻게 됩니까?”
단장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줄 수는 없지만, 당분간, 아니 한 3개월만 버티면......”
또 다른 단원은 단장에게 원망 섞인 투정을 했다.
“돈도 없이 어떻게 버틸 수가 있어요? 차라리 서울역에서 지게라도 지어야 딸린 식구 입에 풀칠을 하지.”
월급을 줄 형편도 못 된다는 단장의 말에 단원들은 실망하고 반발했다. 단원들은 뚜렷한 해결책을 보이지 못하는 단장에게 더 이상 매달릴 수 없었다. 다른 극단으로 가거나, 다른 일을 찾아 나서거나, 새로운 극단을 만들거나 하여 뿔뿔이 흩어졌다. 조선 최고의 극단이라 자부하던 취성좌가 이렇게 공중분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천하의 취성좌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단장에게 그동안 준비해 온 ‘동방이 밝아온다’의 공연은 어떻게 되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장은 한 숨을 쉬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취성좌가 쓰러지면, 제2의 취성좌를 만들어서라도 막은 올라야 해!”
남은 단원들은 그동안 단장과의 의리를 생각하여 취성좌를 재건하는데 힘을 보태기로 했다. 단원들은 채권자들의 빚 독촉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취성좌 간판을 내리고 새로운 극단을 만들었다. 취성좌 무대가 아닌 새로운 무대라는 뜻의 ‘신무대’로 극단 이름을 짓고 새 출발을 했다. 당분간 단장이 없이 단원들이 공동 경영하는 체제였다. 김현 단장은 드러나지 않게 고문을 맡아 극단을 지휘했다.
극단 신무대는 연말 성수기에 개막공연을 하여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했다. 공연할 연극은 그동안 준비해왔던 ‘동방이 밝아온다’를 무대에 올리기로 했다. 개막공연은 취성좌에게 호의적이었던 단성사 박 사장의 도움으로 단성사에서 하기로 했다. 공연을 앞두고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광고기사를 부탁했다. 단성사 2층에는 공연을 알리는 간판이 붙었다. 얼굴 그림과 함께 막간극 진행에 신난다. 독창에 이애리수, 주연에 신난다와 이애리수라고 크게 써져있었다. 단원들이 올라간 간판을 보고 한 마디씩 했다.
“이제 신영일, 아니 신난다가 취성좌의 간판이야.”
“막간극 진행을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주연이라도 빼줄 수가 없네.”
“북치고 장구 치고, 이제 극단을 먹여 살리네, 그려.”
드디어 단성사에서 ‘동방이 밝아온다’ 첫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공연을 앞두고 화장실에 들렸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사방 벽은 낙서로 가득 찼다. 백묵과 연필로 쓴 낙서가 대부분이었다.
“이곳은 이완용이 좋아하는 특급 식당이다.”
이 낙서는 여러 공중변소에서 보았다. 언젠가 막설 소재로도 써먹어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 이완용은 개이니, 똥개처럼 똥이나 먹으라는 것이다.’
낙서는 사회의 바닥에 흐르는 민심의 표현이었다. 일본 경찰은 낙서를 가볍게 여기지 않고 단속을 심하게 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전국 각지의 공중변소를 일제히 조사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불온’한 낙서를 하다가 발각되면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의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되어 실형을 언도받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천천히 벽에 있는 낙서를 읽으며 공연 전의 긴장을 해소하였다.
‘일본 놈은 전부 조선에서 물러가라.’
‘일본 천황 타도!’
‘조선인아, 열심히 자식을 낳아 후에 일본과 전쟁하여 승리하자.’
그 밑에 연필로 쓴 낙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보라, 2천만 동포여, 조선을 일으켜 세우자, 어리석은 사람들아 먹고사는 것만이 우리를 위하는 일인가. 일본인 노예로서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포여, 각성하여 협력일치 국권회복에 노력하자. 조선을 독립시키자. 조선독립만세!’
연필로 쓴 글인데 낙서치고는 꽤 장문으로, 이전에는 못 보던 글이었다. 내 앞에 이곳을 이용한 사람이 썼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관객 중의 한 사람일 수도 있는데.....’
드디어 막이 올랐다. 나는 동경 유학을 떠났다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고향인 천평리로 내려가서 농촌 계몽운동을 벌이는 정국의 역할로 무대에 섰다.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강연회에 참석하여 농촌에서 계몽운동을 하는 박승희를 만났다. 박승희는 이애리수가 맡아 연기했다. 정국은 승희의 경험에 자극을 받아 보다 본격적인 농촌운동에 몰두하게 되었다.
연기가 물이 오른 느낌이었다.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공연이 매끄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 대사 한 동작에 관객들이 몰입해주고 있음을 느꼈다. 글을 가르치던 정국이 ‘아는 것이 힘이다 배워야 산다!’하고 아이들에게 외치고 1막이 끝났다.
1막을 마치고 이제 2막을 준비해야 했다. 무대장치를 바꾸는 동안 막간극을 올려야 했다. 관객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시작한 막간극이 이제는 연극보다 더 인기였다. 나는 큰 박수를 받으면서 다시 무대에 올랐다. 관객들이 나의 예명인 ‘신난다!’를 여기저기서 외쳤다. 무대에 올라오자마자 관객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렵고 힘든 우리 인생에, 연극으로, 또 막간극으로 근심과 걱정을 날려버립시다. 막간극 진행을 맡은 신난다입니다.”
관객들은 ‘신난다!’를 연호하며 함성을 질렀다. 확실히 연극 무대보다 막간극의 무대가 관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새로 준비한 막설을 속사포처럼 뱉어내니 관객들의 폭소가 터졌다. 관객들의 웃음소리에 마음이 벅찼다.
“다음 순서는 여러분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오늘의 주인공 이애리수 양의 독창이 있겠습니다.”
관객들은 이애리수라는 이름이 나오자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오늘 연극의 히로인이자 아름답고 구슬픈 목소리의 주인공, 이애리수 양이 ‘황성 옛터’를 부르겠습니다.”
극장이 떠나갈 듯 박수를 받으며 분홍빛 긴 드레스를 입은 이애리수가 등장했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설운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 지네."
가냘픈 목소리로 눈물과 한숨이 섞인 듯 부르는 노래에 관객은 조용히 무대에 집중했다. 연약한 여인이 달빛 아래 홀로 서서 망해버린 나라의 폐허를 보며 눈물짓는 것과도 같은 미묘하고 신비한 경험에 객석은 숙연한 분위기였다. 이애리수가 2절을 부를 때부터는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노래를 마치고 이애리수가 인사를 하자 객석에서는 재창을 외쳤다.
“‘앙코르! 앙코르!”
관객의 기세가 너무나 대단해 실망시킬 수 없었다. 나의 요청으로 이애리수는 <황성 옛터>를 다시 불렀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아, 가엽다 이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관객들은 울먹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아, 가엽다’를 부르다가 감정이 북받쳐 객석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무대에서 이애리수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관객들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에 빠져 함께 노래를 부르며 훌쩍였다. 극장에 임석한 일본 순사는 이상한 분위기에 당황하여 호각을 입에 물고 불어 댔다.
“삐익! 삐익!”
관객들은 일본 경찰의 개입에 분노했다.
“나쁜 놈들, 왜 노래도 따라 부르지도 못하게 해. 만세를 부르는 것도 아닌데……”
“이제는 노래 부르는 것도 치안방해란 말인가?”
다시 막이 올랐다. 사람들의 마음은 진정되지 않은 채 분위기가 묘했다. 나는 다시 정국으로 분장해 무대에 올랐다. 갖가지 농촌사업을 벌이는데, 일손이 부족해 박승희에게 천평리의 부녀회를 이끌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승희는 손을 걷어붙이고 부녀회를 조직하는 한편 마을 예배당을 빌어 강습소를 운영하였다. 밤에는 한글과 셈본 공부를 위해 야학을 열었다.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에 정국은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일본 주재소의 방해로 사람이 모이는 것을 금지해 강습소와 야학이 문을 닫게 되었다. 정국과 승희는 일본 순사들의 무례한 조치에 분노했다.
점점 공연이 막바지로 향해 갈수록 연극은 더 힘을 받았다. 대사 하나하나, 연기 하나하나에 관객이 집중하고 있음을 느꼈다. 관객들은 내가 움직이는 대로 끌려왔다. 관객 전체와 같이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연극은 마지막 장면을 남겨두고 있었다. 어둠 속 객석의 몰입에 전율을 느꼈다.
‘이제 마지막 대사를 날리면 연극은 끝난다. 내가 만든 희곡에 내가 주연으로 출연한 연극이다.’
관객을 향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우리 모두 잠에서 깹시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잠을 깨어 어두운 새벽을 뚫고 나아갑시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외침에 관객들은 환호했다. 관객들은 몰입하며 무대에 화답했다. 심장의 피가 솟구치는 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잠시 어지럼증을 느끼고 시야도 흐려졌다.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관객들의 함성에 뭔가 갈구함을 느꼈다.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힘차게 두 주먹을 질렀다.
“우리는 이대로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 동포들은……”
극장에 임석한 일본 순사 자리를 흘끗 본 후 힘차게 외쳤다.
“우리 동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나 나갑시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이곳저곳에서 주먹을 허공에 가르며 고함을 질렀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잠을 깹시다!”
“나갑시다, 동포여!”
그때였다. 객석 뒤쪽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조선독립만세!”
객석이 순간적으로 얼음이 되었다. 나도 온몸이 경직되었다. 침묵을 깨고 어둠 속에서 객석 여기저기에서 함성을 질렀다.
“만세!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어둠 속의 극장은 혼란에 빠졌다. 그때 고함 소리와 함께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어댔다. 일본 순사는 당황하여 호각을 불어 대며 외쳤다.
“불 켜! 불을 켜란 말이야!”
극장 안에 불이 들어오고, 긴장된 모습으로 사람들은 주위를 살폈다. 일본 경찰은 재빨리 팔을 내리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고 외쳤다.
“저 놈 잡아라!”
이어서 호루라기가 소리가 극장을 울렸다.
“삐익! 삐익!”
일본 경찰이 소리쳤다.
“저놈 잡아라! 저놈 놓치지 마라!
일본 경찰들은 그 사람 쪽으로 달려갔다. 극장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들이 엉켜 극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본 경찰은 고함을 질렀다.
“앉아있어, 모두 움직이지 마!”
일본 경찰들은 아까 본 그 사내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 관객들은 일본 경찰의 외침에도 서로 섞여 우르르 극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경찰들은 관객들에 시선을 가려 그 사내를 잡기가 어려웠다. 이리 뛰고 저리 뛰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
나는 무대에서 객석의 혼란을 바라보며 굳어 버렸다. 극단 단원들이 황급히 무대에 올라와 함께 인사하고 서둘러 막을 내렸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일본 경찰은 분장실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왔다.
“누구냐! 그 따위 대사를 한 놈은!”
나는 앞으로 나섰다. 씩씩대며 분을 내던 일본 경찰은 나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빠가야로! 나쁜 새끼!”
나는 비명을 지르며 꼬꾸라졌다. 경찰은 쓰러진 나의 어깻죽지를 구둣발로 밟았다.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일으켜 세워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얼굴에 피가 튀었다. 또다시 주먹으로 복부를 강타했다. 숨을 쉴 수도 없이 그대로 꼬꾸라졌다. 나는 그 길로 종로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에 가자마자 거칠게 다루어졌다. 극장에 임석한 고등계 형사 마달영은 담배를 꼬나문 채 나를 심문하였다. 종로경찰서에서도 악명 높아 ‘독사’라 불리는 조선인 형사였다. 어린 나이에 고향 주재소 급사로 시작하여 일본 순사를 거쳐 형사까지 진급한 독한 사람이었다. 마달영은 책상을 치며 소리쳤다.
“이건 단순한 연극이 아니라 선동이야! 황성옛터부터 분위기를 잡더니만,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냄새가 나.”
마달영이 신경질적으로 손짓을 하니 형사들은 다짜고짜 나의 윗옷을 벗기고 사정없이 구타를 하였다. 나는 고통 속에 정신을 잃었다. 찬 물을 뒤집어쓰고 정신이 깨어났다. 온몸에 맥이 풀린 가운데 공포와 고통이 엄습했다.
“객석에서 만세를 부른 놈들이 누군지 불어! 너희들 사전에 공모한 거잖아.”
모른다고 하자 다시 사정없이 구타를 하였다. 마달영의 음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 비행기 좀 태워줘야겠어.”
그때 미와(三輪)가 취조실로 들어왔다. 종로경찰서에서 고등계 계장으로 ‘염라대왕’이라 불리던 자였다. 그의 손에 거치지 않은 항일 운동가들이 없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악명이 높았다. 미와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 형사, 딴따라가 무슨 대단한 저항의식이 있다고 비행기까지 태워야 하겠어?”
마달영이 대답했다.
“조선인은 지게꾼도 저항의식이 있습니다.”
“그래?”
미와는 마달영에게 고개를 돌려 가소롭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자네는 어떻게 대일본제국의 경찰이 되었는가?”
미와의 싸늘한 말에 마달영은 말을 더듬었다.
“죄, 죄송합니다!”
“단단히 혼냈으면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해. 방금 단성사 사장이 면회를 왔었어. 그는 조선 문화계에서 중요한 인사야. 우리가 협조를 얻어낼게 많아. 내가 오늘 밤은 안 된다고 돌려보냈으니 내일 다시 올 거야. 그때는 저 놈을 정신을 차리게 해서 면회를 시켜줘.”
나는 미와가 돌아간 뒤에도 민족정서를 자극하고 치안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철야조사를 받았다. 마달영이 외쳤다.
“너의 연극인생은 끝났어. 넌 이제 감옥행이야. 감옥을 나와도 평생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감시를 받으며 빌어먹고 살아야 할 거야.”
새벽녘이 되어서야 유치장으로 옮겨졌다. 얼굴이 얼얼하고 겨울 추위가 온 몸에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구치소의 찬 기운은 내가 마주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연극을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다.
아침이 되자 단성사 박승필 사장과 단장이 면회를 왔다. 나는 취조실에서 당한 일로 얼이 빠져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랐다. 단장과 박 사장이 너무 걱정 말라고 했다. 문득 마달영이 ‘너의 연극인생은 끝났어!’하는 말이 떠올랐다. 그것만은 어떻게든 막아달라고 애원했다. 박 사장이 내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해보겠네.”
박 사장과 단장이 미와와 마달영을 만났다. 마달영이 말했다.
“무대에서 민족주의적 색채가 조금이라도 있는 대사를 하면 징역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소. 게다가 객석에서 만세 부르던 놈들과 공모했다는 의심도 있어요.”
단장이 변명을 하였다.
“이번 사건은 우발적입니다. 우리 배우는 불온한 이야기를 한마디도 안 했어요. 직접 보시지 않았습니까? 불순분자들이 우리 연극을 이용한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모인 데만 가면 선동 질을 하는 놈들입니다. 절대 공모라든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미리 공모를 했다면 그 나쁜 놈이 불순한 말을 외치면서 삐라라도 뿌렸겠지요.”
박 사장도 거들었다.
“극단 단원들은 한 식구입니다. 한 사람이 잘못하면 모두가 일을 못하고 밥을 굶어야 하는 데 누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신난다는 이번 일을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징역형이라니요? 그건 너무 가혹합니다. 반성하는 의미로 책임을 물어 일정기간 연극무대에 못 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감옥만은 면하게 해 주십시오.”
미와가 말을 꺼냈다.
“잘 알겠소. 그동안 박 사장이 조선 공연계를 위해 애쓴 공을 감안해서 처리해보도록 합시다.”
“미와 경부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좋소. 그럼 그 배우를 감옥에 보내지 않는 대신, 아예 연극무대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하고 이번 사건을 마무리하겠소.”
박 사장과 단장은 당황했다. 박 사장이 말했다.
“영원히 추방하는 것은 배운 게 연극밖에 없는 사람을 길바닥에 앉아 빌어먹고 살라는 것인데…… 얼마간 금지 기한을 정해주시지요.”
미와는 박승필의 간청에 마달영을 슬쩍 보며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 관할에서 평생 연극무대에서 설 생각은 하지 마시오. 경성이 아니라면 우리 종로경찰서는 상관 않겠소. 알아들었소?”
박 사장은 더 이상의 요구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미와가 말을 이었다.
“그 대신 앞으로 문제가 없도록 박 사장이 보증을 해주어야 하겠소. 만약 그 배우가 이 약속을 어기면 그 배우……”
미와는 신난다의 조서를 흘끗 보고 다시 말했다.
“신영일은 물론, 박 사장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