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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Aug 13. 2022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7)

보성군이 손자를 미워하여 죽음에 몰아넣으려고 하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7)


 성종은 애초에 죄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이심원을 두 달 만에 풀어주어 도성에 돌아올 수 있게 하였다. (성종실록 , 재위 9년 10월 29일) 

 

보성군은 아들 평성도정을 핍박하여 손자인 이심원을 이번에는 아버지가 직접 고발하게 하였다.  

성종 11년 11월 29일, 승지들이 평성도정이 아들을 고발한 일을 아뢰었다.   

"종부시(宗簿寺)가 보고하기를, 평성도정이 장자(長子)인 이심원은 패역하므로, 조상의 제사를 이어받기가 마땅하지 아니하니, 둘째 아들로 하여금 제사를 받들게 하고, 심원의 패역하고 불순한 죄를 국문하게 하라고 고발장을 내었다고 합니다.” 


 임금이 말했다.

 "지난번에 심원이 임사홍을 가리켜 간사하다고 하니, 보성군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심원의 불효를 소송하였으므로, 죄주게 하였다. 이제 이른바 불효하다는 것 또한 그 실정을 알지 못하겠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승지가 대답하였다. 

 "심원의 아내가 상소를 올려, 심원을 불효한 자라고 말한 것은 조부 보성군과 임원준이 꾸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임금이 말했다. 

 "상소를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평성도정을 불러서 실정을 물어보도록 하라.” 

 승지의 부름에도 이심원의 아버지 평성도정은 병을 핑계 대고 오지 아니하였다.


 성종 11년 12월 16일, 임금이 정승들과 육조의 판서들, 그리고 대간들을 어전에 불러 이심원의 일을 의논하였다. 영의정 정창손이 아뢰었다. 

 "심원이 도리를 다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비와 조부가 강상(綱常) 죄인 불효와 불순종으로 고하지는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청컨대 먼 곳에 유배시켜 뒷사람들을 징계하소서.” 

 강상죄는 조선시대의 윤리인 삼강오상(三綱五常)을 범한 죄를 말한다. 삼강오상은 부자, 군신, 부부, 형제, 친구 간의 윤리를 뜻하나, 대개 자식이 부모를 살해 혹은 폭행하는 등의 하극상이나 불효의 죄를 다루는데 강상죄를 적용하였다. 


 좌의정 윤필상도 나서서 아뢰었다.  

 "심원이 죄를 면하고자, 처(妻)에게 부탁하여 조부를 고소한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심원의 처가 상소한 후에 풀어 준다면, 사람들이 처의 상소로 죄를 면할 수 있었다고 일컬을 것입니다. 이는 아비가 아들을 고하고, 자녀가 아비를 고소한 것으로서, 강상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어지럽힌 것이니, 이러한 풍속은 자라나게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심원의 직을 박탈하고 먼 곳에 유배시키소서.” 


 대간들은 대신들의 의견과 달랐다. 사간원 사간이 아뢰었다. 

 "심원이 그 조부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은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만약 무언가 모략이 있어서 조부와 아비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였다면, 밝은 시대에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헌부 지평이 아뢰었다.

 “심원이 처에게 상언하도록 부탁한 것 또한 부친과 조부를 상대로 스스로 변호할 수 없기에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사료되옵니다. 심원이 조부에게 미움을 받은 이유는 성상께서도 아시고 나라 사람들도 아는 바입니다. 이 일은 더 이상 논하여 죄를 묻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하옵니다.”  


 성종은 대신들과 대간들의 의견을 모두 듣고 명하였다. 

 “심원에게 죄가 있는 것처럼 꾸며 고소하여 죄에 빠지게 했는데, 강상의 죄를 물어 죄를 준다면 술책에 빠지는 것이다. 하지만, 조부와 부친이 고발하였는데도, 법을 무시하고 죄주지 않기도 어렵다. 그러니 직첩을 거두고 외방에 살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성종실록, 재위 11년 12월 16일)


 임금도 이심원이 억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부모와 부모를 꾸짖는 등 심한 불효를 한 죄는 강상죄이며, 피해를 받은 부모와 조부모가 고소를 하여야만 죄가 성립하는 친고(親告) 죄였다. 강상죄는 부모와 조부가 고발하면 죄를 인정하여 처벌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이 법에 따라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 법에 의하면 사형이므로 성종은 어쩔 수 없이 유배지에 보내는 것으로 타협하였다. 


 홍문관 관원들이 이 소식을 듣고 나섰다. 성종 11년 12월 18일, 홍문관 부제학과 관원들이 이심원은 억울하니 바로잡아 달라고 청하였다.  

 "삼가 듣건대 이심원을 외방에 부처한다고 하는데, 신들은, 보성군이 사위 임사홍이 죄를 받았기 때문에, 손자 보기를 원수같이 여겨 불효로 무고한 것으로 여깁니다. 신들은 아마도 전하께서 보성군의 술책에 빠진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지난번에 심원이 죄가 없음을 속속들이 아셨으나, 모두 용서할 수가 없어서 외방에 내치셨다가 곧 명하여 풀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이로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전하의 밝으심을 아는 바입니다. 이에 대해 보성군은 손자에 대한 분함을 풀지 아니하고 아들을 핍박해서 이심원을 불효로 무고하게 하였습니다. 평성도정이 고한 것은 아비인 보성군의 명에 억눌리어한 것이므로, 부득이한 일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밝게 살피시어 간사한 계책으로 인하여 일을 그르치지 마소서.”


 성종은 부친이 직접 강상죄로 고발하였으니, 법에 따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홍문관 관원들의 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심원은 결국 강원도 이천(伊川, 지금의 철원지역)에 부처(付處)하게 되었다. 경기도 장단에 이어 두 번째로 외방에 내쳐졌다. 이번에는 맏아들로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지위도 빼앗기게 되었다. 


 사관은 이 사건을 지켜보며 분노의 감정을 실어 기록했다. 

 "보성군이 이심원을 미워하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려고 하였으나, 주상의 성명(聖明)으로 능히 해칠 수 없게 되자 그 아비를 핍박해서 죄악을 모함하여 유배를 보내고 맏아들의 지위마저 빼앗기에 이르렀다. 이는 너무 심하지 않은가?” (성종실록, 재위 11년 12월 16일)


 사관의 논평은 당시 조정의 신진 관원들이 이 사건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후세에 보여주고 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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