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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류산 Aug 15. 2022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8)

이심원은 능지처사되고, 그 아들도 모두 참형에 처해졌다

 조선 최대의 내부고발자, 이심원 (8)


 이심원이 강원도에 유배를 떠난 지도 두 해가 흘렀다. 

 임금의 형님인 월산대군은 임금을 알현하고 종친들의 의견을 아뢰었다.

 "주계부정 이심원은 곧고 충성된 신하입니다. 보성군이 불효하다고 고한 것은 그가 사랑하는 사위인 임사홍이 죄를 입게 되었기 때문에 분하고 성이 나서 한 짓입니다. 평성도정이 심원을 큰 아들의 지위를 박탈한 것은 부친의 강압에 몰려서 부득이 그렇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주계부정이 평생을 산간벽지에 머무르면서 억울하게 영영 천은(天恩)을 입지 못한다면, 그의 강직한 심정이 애통할 것입니다.” (성종실록, 재위 13년 7월 26일)

 

 임금은 월산대군의 진언에 곧바로 의금부에 명을 내려, 강원도에 부처한 이심원을 석방하게 하였다.  


 이심원은 유배지에서 풀려났으나 수입이 없어 경제적 궁핍은 계속되었다. 강원도로 유배되면서부터 주계부정이라는 봉작명도 잃고 종친으로서 받는 식읍과 그곳에서 수확량의 일부를 받게 된 것도 없어진 지도 오래되었다. 


 3년이 지난 성종 16년 1월, 임금은 새해를 맞아 승지들에게 이심원의 문제를 물었다. 승지가 아뢰었다.  

 “신이 듣건대, 평성도정이 병이 나자 보성군이 평성도정으로 하여금 자기의 이웃집으로 옮겨 와 있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네가 만일 이심원을 만나본다면 마땅히 불효를 논하겠다.’ 하였으며, 이 때문에 이심원이 그의 아비에게 가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본다면 적장자를 폐지한 것이 어찌 평성도정의 본심에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이심원은 애매한 가운데 8년을 버려두었습니다. 설사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징계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서용(敍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임금은 승정원에 명하였다.

 “전 주계부정 이심원을 용서하여 다시 쓰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하지만 이 일은 큰일이므로 이조는 물론 정승들과 종친들의 의견을 듣지 않을 수 없다.”


 성종 16년 1월 27일, 임금은 종친과 대신들을 불러 이심원의 서용 문제를 의논하였다. 

 영의정 정창손이 아뢰었다. 

 "이심원의 죄는 조부를 능욕한 것이니, 이는 강상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서용하지 마소서.”

 좌의정 윤필상도 영의정과 같은 의견이었다.  

 "이심원은 비록 재주는 있다고 하나, 조부에게 불효하는데 그의 재주를 어디에 쓰겠습니까? 청컨대 서용하지 마소서.”


 종친을 대표하여 월산대군이 나섰다.  

 "당초에 이심원의 죄는 애매합니다. 이번에도 만일 불효하다고 논하여 다시 쓰는 것을 막으면, 신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를 위해 말하는 사람이 장차 있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조참판 김종직이 아뢰었다. 

 "이심원은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고 소학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을 즐겨하였으니, 조부를 능욕할 까닭이 없습니다. 신은 심원이 죄를 얻은 것은 광장(匡章)과 비슷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장은 춘추전국 시대 제(齊) 나라의 장군이었다. 광장이 아버지를 질책하여 당시에 모두 불효자라고 욕했으나, 맹자(孟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착한 일을 권하다가 서로 맞지 않게 된 것이라고 하며 광장을 변호했다.


 성종은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결단하였다.

 "이심원이 불효자가 아님에 대해서 과인이 보증하겠다. 그에게 일어난 일은 과인이 자세히 아는 바이니 서용하는 것이 옳다.” (성종실록, 재위 16년 1월 27일)

 임금은 곧바로 승정원에 명하여 이심원에게 종친에게 내려주는 봉작명인 주계부정을 돌려주고, 정 3품 명선대부(明善大夫)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이심원을 용서하여 조정에 다시 들인다고 명하자,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특히 훈구대신들은 임금의 명을 되돌리려고 했다. 좌의정 윤필상이 아뢰었다. 

 "이심원의 죄는 조부와 아비가 직접 고발한 것입니다. 이심원의 아비가 그의 불효한 것을 고하고 적장자를 폐지하였으니, 만일 애매하다고 고발을 부정하면, 법이 따라서 폐지되고 강상도 문란해질 것입니다. 이심원이 마음 아파하는 것은 작은 일이고, 천하의 큰 법은 무너뜨릴 수 없는 큰일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이심원의 일은 바로 광장(匡章)과 같다. 이심원이 참으로 불효한 사람이라면 그 실태가 평소에 드러나게 되었을 터인데, 어찌 임사홍의 일에 이른 다음에야 나타났겠는가? 만일 실지로 불효하였다면 종친들이나 조정에서 누가 알지 못하였겠는가? 이심원은 진실로 그러한 사실이 없으므로 내가 당초부터 죄를 가하지 않으려고 하였었다. 영의정이 완전히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외방에 부처(付處)하도록 하였던 것인데, 지금 이심원을 영구히 인륜의 죄인으로 만들려고 한다. 내 마음에도 통탄스러운데 하물며 이심원의 마음이야 어떻겠는가?” (성종실록, 재위 16년 2월 7일)


 새로 임명된 대간들과 훈구대신들은 이심원의 서용을 계속 문제 삼았다. 

 성종 16년 2월 8일, 임금은 대신들과 종친들에게 이심원의 서용 문제를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이번에는 보성군과 평성도정도 입시하여 의논에 참여하게 했다. 보성군이 아뢰었다.   

 "평성도정의 아들 심원이 조금 학문을 알므로 신이 항시 소중하게 여겨왔는데, 지난번에 심원이 대궐 뜰에서 신을 노예처럼 대하기에 그때 이후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에 또 친척들이 모인 곳에서 신을 보자 갖은 말로 모욕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상의 분부를 듣고 마음을 풀었습니다. 다만 심원이 처를 시켜 올린 상소에 평성의 고발을 신이 위조한 것이라고 하여 성상께 상달한 것은 유감입니다. 대저 심원이 조금이라도 사리를 안다면 조부의 허물이나 악을 드러낼 수 없는 법입니다.”


 임금이 말했다. 

 "옛사람의 말에, 부자간의 일은 남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듯이 과인이 그 사이를 판단할 수는 없소. 임사홍이 대간들을 사주하여 현석규를 배척한 일을 이심원이 나라를 위해 자신을 잊고 가문도 돌보지 않고서 말을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옳지 못한 일이겠소?”

 

 영의정 정창손이 보성군을 거들었다.   

 “죄 중에 불효보다 더 큰 것이 없는 법입니다. 이심원은 그의 조부에게 불효하다는 죄를 얻었습니다. 만일 그의 죄를 용서하려면 마땅히 그 조부의 용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평성도정은 아예 눈을 감은 채 묵묵히 논의를 듣기만 하였다.


 임금은 이심원의 서용 문제를 두고 일곱 번을 논의하게 하며 공론화 과정을 거쳤다. 월산대군 등 종친들과 홍문관의 관원들은 이심원을 적극 변호하였으나 당사자인 보성군과 훈구대신들은 여전히 거센 반대를 하였다. 


 드디어 임금이 의논을 중지하고 결론을 지었다.

 "뭇 의논이 강상은 중요한 것이라고 하는데, 내가 어찌 독단으로 결정할 수 있겠는가? 이심원에게 내려준 벼슬을 거두어라.”

 임금은 보성군과 평성도정에게 말했다. 

 "심원이 어찌 장차 과오를 고치게 될 리가 없겠는가? 훗날 경들이 심원이 과오를 고쳤다고 고하면 내가 마땅히 서용 하겠다.”


 사관은 아들의 서용을 둘러싼 의논에 참여한 평성도정의 모습을 기록하였다.

 ‘그는 이틀 동안의 의논에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였고, 근심하는 기색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성종실록, 재위 16년 2월 9일)


 이심원은 끝내 조정에 복귀하는 것이 취소되었다. 

 이심원의 아들 이유녕이 장성하여 과거에 급제하고 사관이 되었다. 이유녕은 승정원일기 등 당시의 기록을 근거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하지만 보성군과 훈구대신의 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심원은 결국 임사홍이 득세한 연산군 때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심원에 몇 개월 앞서 죽은 아들 이유녕의 죽음을 기록하며 사관이 논평했다. 

 '임사홍 부자가 바야흐로 총애를 받았는데, 이유녕의 부친 이심원이 임사홍의 간사함을 배척하므로 늘 이를 갈던 터이니, 이유녕 등의 죽음은 실로 임사홍이 한 짓이었다.' (연산군일기, 재위 10년 윤 4월 19일)


 임사홍과 함께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은 이심원을 능지처사를 시키고 아들을 모두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이심원은 마음씀이 불초하고 또 불초한 자식을 두었으니, 마땅히 특별한 법으로 논죄한 연후에야 이와 같은 사람은 남는 부류가 없어질 것이다. 그 자식까지 아울러 모두 참형에 처한 뒤에야 가할 것이니, 바로 오늘 시행하도록 하라.” (연산군일기, 재위 10년 10월 1일)


 훗날 선비들에게 충신으로 추앙받는 이심원의 조선 역사에서 최대의 내부고발자로 맞은 비참한 최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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