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들의 집과 연회가 호화롭고 분수에 넘친 것은 백성들의 고혈 덕분입니다
유자광은 붓을 들어, 먹물을 가득 찍었다.
“신이 듣건대 근래에 감옥에 죄수가 하나도 없다 하여 해당 도의 관찰사가 표창을 받았다고 하는데,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감옥에 죄수가 없다는 것은 옥사에 원통함이 없다는 것이고, 옥사에 원통함이 없다는 것은 백성이 편안하다는 것이며, 백성이 편안하다는 것은 하늘이 기뻐할 일입니다. 하늘이 기뻐하고 백성이 편안한데, 어찌 하늘이 산을 무너뜨리고 물을 넘치게 하여 꾸지람을 내리겠습니까?”
유자광은 재상들의 집에 지방 수령들이 보내는 마차가 줄을 이어 들어가는 장면을 떠올렸다.
“공경대부로서 의복과 집, 수레와 말, 접대와 연회가 호화롭고 분수에 넘친 것은 그들이 지방의 감사와 수령과 서로 통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백성이 어찌 원통하게 여기지 않겠으며, 하늘이 어찌 노하지 않겠습니까?”
우승지 임사홍이 상소를 받쳐 들고 임금에게 나아왔다.
“전하의 구언에 답한 유자광의 글이옵니다.”
성종은 흥미를 가지고 상소를 펼쳤다.
“물난리와 가뭄을 만났을 때, 전하께서는 근신하는 뜻으로 피전(避殿)과 감선(減膳)을 하시며 하늘을 두려워하고 반성하시는데, 공경(公卿)들은 손님을 맞고 친구를 전송하며 호화로운 잔치를 여전히 열고 있었습니다. 주상께서는 백성을 사랑하여 세금을 가볍게 해주려고 하시는데, 공경들은 사사로이 서로 청탁하고 감사와 수령으로부터 뇌물을 공공연히 받고 있습니다.”
피전(避殿)은 재해(災害)가 있을 때, 임금이 근신하는 뜻으로 궁궐을 떠나 소박한 거처로 옮겨 머무는 것이고, 감선(減膳)은 임금의 수라상 음식물의 수효를 줄이는 것을 말하였다.
성종은 유자광의 상소를 읽으면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상소의 글은 날생선이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유자광의 상소를 읽으면서 막혔던 체증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본래 모든 대간은 군주의 이목(耳目)이 되어 장(長)이 없고 상하가 없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임금을 섬기면서 각기 기탄없이 말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합당하지 않은 자가 대간으로 있다면, 어찌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을 강한 기개를 가질 수 있겠으며, 대의(大義)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절개를 알겠습니까?”
임금은 상소 읽기를 멈추고 임사홍에게 물었다.
“유자광이 대간은 장(長)이나 상하 지위를 가리지 않고 모든 대간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임금을 섬기면서 각기 기탄없이 말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유자광의 말은 일리가 있으나, 무엇을 아뢸지 서로 의논하지 않으면 거르지 않은 대간들의 주장이 난무할 수도 있을 것이옵니다.”
성종은 다시 눈길을 상소에 두었다.
“신이 듣건대 세종조(世宗朝)에 정갑손은 대사헌이 되어서 친척 동생인 정종(鄭種)이 새로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자, 정갑손은 정종의 학문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아뢰어 파직을 시켰다고 합니다. 감찰은 사헌부에서도 낮은 직급인데 정종이 어찌 그 직(職)을 감당하지 못하겠습니까만, 그런데도 정갑손은 자격을 못 갖추었다고 파직하도록 아뢰었던 것입니다. 하물며 의정부, 육조(六曹), 대간은 임무가 중한데, 혹시라도 자격을 못 갖춘 자가 관원으로 있지는 않겠습니까? 의정부에 자격이 없는 자가 있으면 음양이 조화될 수 없고, 육조에 자격이 없는 자가 있으면 백성이 잘 살 수 없으며, 대간에 자격이 없는 자가 있으면 조정이 기강을 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임금은 유자광의 상소를 마저 읽었다.
"예로부터 제왕이 합당한 인물을 얻어서 관직을 맡기려고 한 것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영화나 누리며 앉아서 녹(祿)만을 먹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가뭄과 물난리가 서로 잇따르며, 산이 무너지고 물이 넘치는 것은 관리들이 백성들과 하늘을 분노하게 한 까닭이지, 어찌 전하의 덕에 결함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겠습니까?”
성종은 상소를 다 읽고 임사홍에게 말했다.
“유자광은 실로 특출하다. 재상들의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대간의 비위도 맞추지 않고, 마음속에 품은 바가 있으면 그대로 말하지 않는가.”
성종은 유자광의 상소로 인해 다시 한번 조정이 들썩일 것임을 직감했다.
‘지금은 재해가 누구 때문이라는 것을 따질 것이 아니라 힘을 다하여 재해를 극복해야 할 때이다.’
성종은 임사홍에게 상소를 내려주며 명했다.
“유자광의 상소는 사관을 제외하고 조정의 누구라도 필사를 요구하면 절대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성종은 이어서 명했다.
“이조에 명하여 지난번 유자광에게 뺏은 관작을 돌려주게 하라.”
유자광은 상소를 올린 다음날 종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를 되돌려 받았다.
유자광이 올린 상소의 대략적인 내용은 조정에 순식간에 퍼졌다. 조정의 젊은 관리들은 유자광의 상소 내용을 입에 오르내리며 조정의 대신들과 대간들을 비난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들끓었다. 젊은 관리들은 하늘의 벌인 재해(災害)에 응답하려면 삼정승을 모두 바꾸고 육조판서와 대간들 중에서도 적합하지 못한 자는 바꾸어서 하늘에 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도 하였다.
조정의 훈구대신인 삼정승과 육조판서, 그리고 대간들도 유자광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상소에 분개하였다. 유자광은 이번 상소로 인해 조정의 대신들과 대간들을 모두 적으로 만든 셈이었다.
영의정 정창손과 의정부의 정승들은 한자리에 모여 의논하였다.
“유자광이 이번에도 몹쓸 상소를 올렸는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하겠소?”
“공경대부가 분수에 맞지 않게 사치하고, 지방수령들에게 뇌물을 받는다고 했다는데 그냥 말없이 있다가는 조정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그대로 믿을 것입니다.”
정승들과 함께 임금에게 나아간 영의정이 아뢰었다.
"유자광이 상소를 올려 조정 신하들의 잘못을 논했는데, 만약 학문이 부족하고 견문이 적어서 합당하지 않는다고 했다면 신들은 그 비난을 감수하겠습니다. 하지만 극도로 사치하여 분수에 넘치고, 감사와 수령들과 서로 통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착취하였다는 말이 있다고 하던데, 모든 대신들이 어찌 다 그러하겠습니까? 이것은 반드시 지목하는 대상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유자광에게 물어주소서.”
"유자광의 상소를 과인이 그대로 믿지는 아니하였소.”
영의정이 다시 임금에게 아뢰었다.
"유자광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대궐의 거처도 옮겨 거하시고 반찬의 가짓수도 줄이는데, 공경들은 연회를 베풀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고 하였다니, 신들은 놀랍고 두렵습니다. 감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묻기를 청합니다.”
임금이 오히려 영의정에게 물었다.
"유자광의 상소 가운데 어떠한 말이 바로 경들을 가리키며 비난하는 말인지 알려주시오.”
임금의 뜻밖의 질문에 정승들이 말문이 막혔다.
(사진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