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하가 임금에게 진언(進言)함에는 마땅히 누구는 이러하고 누구는 이러하다고 해야 하는데, 유자광은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바른 도리이겠습니까?”
우찬성은 의정부의 종 1품 관직으로 삼정승을 보좌하는 직책이었다.
임금의 질문에 당황하였던 영의정 정창손은 서거정이 거들고 나서자 임금에게 다시 아뢰었다.
"지금 청하는 것은 유자광을 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자광이 누구를 가리키는 지를 묻고자 할 뿐입니다.”
성종은 이들이 몰려와서 유자광을 국문하게 하여 공격할 빌미를 찾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 일로 유자광을 국문하자는 청에 대한 과인의 대답은 불가(不可)이오!”
의정부의 정승들이 물러간 후, 육조(六曹)와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번갈아 유자광의 상소에 지적을 받았다고 피혐(避嫌)하러 어전에 나아왔다. 피혐(避嫌)은 신하가 탄핵을 받을 때 혐의가 풀릴 때까지 벼슬을 내려놓는 것을 말한다. 임금이 허락하지 않자, 대사헌 윤계겸이 아뢰었다.
“유자광의 상소에 어떤 말들이 있더라는 말만 조정에 떠돕니다. 정확한 상소 내용을 알 수 있도록 신들에게 유자광의 상소를 보여 주기를 청합니다.”
"이미 그것을 들었으면 충분하지, 무엇 때문에 기어이 보려고 하는가?”
대사헌은 승지 임사홍을 따로 만나, 유자광의 상소에서 대간들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히 물었다. 임사홍은 약간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주상께서 저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를 절대로 대간들에게 알려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윤계겸은 애가 타서 다시 물었다.
“내가 듣기로 유자광이 말하기를 본래 대간은 장(長)이 없고 모든 대간이 동등하게 주상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는데, 사헌부나 대사헌에 대해 한 말이 있으면 전해주시게.”
임사홍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주상의 엄명이 있었지만 영감이 이리 부탁하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자신을 애타게 보고 있는 윤계겸에게 임사홍은 느릿느릿 말했다.
“유자광이 말하기를...... 모든 대간들이 각기 기탄없이 말을 다해야 하는데, 어떻게 대사헌이나 대사간의 허락을 맡아야 하고, 모든 대간들의 동의를 받아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아뢰었습니다.”
윤계겸은 가슴이 요동쳤다.
‘이건 틀림없이 내가 성건과 손비장을 탄핵하여 내친 것을 욕하는 것이다!’
임사홍이 짐짓 대사헌을 자극하였다.
“주상께서는 이 말에 대해 저에게 의견을 묻기까지 하였습니다.”
대사헌은 대사간 최한정과 함께 임금에 나아갔다.
"유자광의 상소는 직접적으로 신들을 탄핵하였는데, 어찌 감히 관직에 있겠습니까?”
“유자광의 상소가 다 맞는 말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임금이 아무런 감정을 싣지 않고 말하자, 윤계겸이 최한정을 한 번 본 후 다시 임금에게 아뢰었다.
“신들은 본래 능력이 없는 데다가 또 탄핵까지 받았으니, 억지로 자리에 있으면서 쓰이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어찌 그리 말이 많은가? 물러가도록 하라.”
윤계겸이 멈칫하자, 최한정이 나서서 아뢰었다.
"유자광의 말에, 재상이 감사와 수령과 서로 통하며 거리낌 없이 뇌물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밝혀내야 하는 일인데 그러지 못했으니, 청컨대 신들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현명한 관리를 택하시어 어떤 재상이 불법을 하였는지 밝히도록 하소서.”
성종은 어전이 쩡쩡 울리도록 소리쳤다.
"경들은 유자광의 말은 두렵고 과인의 말은 두렵지 아니한가?”
두 사람은 등줄기에 식은땀을 흘리며 어전에서 물러나왔다.
성종은 유자광의 상소를 조정 관리들의 기강을 잡는데 십분 활용하였다. 성종은 경연에 나아가, 좌우의 신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무령군의 상소에는 누구를 지칭하여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지금의 풍속이 사치스럽다고 말하였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경들은 피혐하는가?”
예조판서가 대답하였다.
"신들을 헐뜯어 말하였으므로 불편할 따름입니다. 지금의 관습과 풍속이 다소 과하기는 하지만 영접하고 전별하는 일은 친구사이의 정(情)입니다.”
"영접하고 전별하는 일을 어찌 모두 금할 수야 있겠는가. 하지만 호화스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경연에 참여한 대신들은 임금의 싸늘한 말에 몸을 움츠렸다.
유자광의 상소는 그동안 큰 혼란이 없이 편안히 지내는 시대를 맞아 사치와 안일에 빠져있는 조정의 신하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며, 국정전반의 분위기를 쇄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성종은 유자광의 상소로 훈구대신들과 대간들, 그리고 조정의 모든 신하들에게 긴장감을 조성시키는데 십분 활용하였다. 젊은 임금은 세조 대왕이 왜 천한 신분인 유자광을 중용하였는지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