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호통으로 어전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즉위 후 최대의 뇌물 사건을 보고받는 자리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사헌부는 칠원(漆原, 지금의 경남 함안지역) 현감 김주(金澍)가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인 재물로 조정의 대신들과 주요 관리들에게 광범위하게 뇌물을 주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사헌부가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 감찰을 보내 수사를 하려고 하자 김주는 임지를 이탈하여 도망쳐버렸다. 임금은 불끈 쥔 주먹으로 용상을 내리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의금부에 명하여 도망 중에 있는 현감 김주를 체포하도록 하라. 현상금을 걸어서라도 기필코 붙잡아야 한다!”
조선시대 고을 수령이 권세가에게 바치는 뇌물은 곡식이나 옷감, 귀금속, 노비와 토지, 그리고 지역에 따라 특산품인 호피(虎皮), 들깨, 미역, 인삼, 더덕 등이었다
조정의 젊은 관리들은 김주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 규탄했다.
“김주는 오랫동안 한명회의 이웃에 살면서 한명회를 아버지처럼 섬겼다고 합니다. 그런 인연으로 한명회에게 청탁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품계를 뛰어넘어 사헌부 감찰로 옮겼다가, 얼마 안 가서 자신이 바라는 칠원 현감이 되었으니, 한명회는 김주로부터 뇌물을 당연한 일처럼 받았을 것입니다.”
“김주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자신을 과시하면서 한명회는 숙부이고 정승인 김정국과 김질은 집안 형제라고 자랑하고 다녔답니다.”
사관(史官)은 이 사건을 실록에 기록하면서 김주(金澍)에 대해 논평했다.
‘김주는 스스로 잘난 체를 하며 사람됨이 경박하였다. 칠원 현감이 되어서는 백성들에게 착취를 일삼아 사람들이 그를 걸 태수(桀太守)라 하였다. 백성들에게 짜낸 재물을 밑천으로 권세 있는 조정의 고관들과 연결하여 불의한 짓을 많이 하였다.’
걸 태수는 중국 하(夏) 나라의 임금인 폭군 걸왕(桀王)에 빗대어 포악한 지방수령을 일컫는 말이었으니 사관이 춘추필법으로 김주를 비난한 것이었다.
한 달 후 의금부가 김주를 체포하고, 임금에게 보고를 올렸다.
"칠원 현감 김주를 붙잡고 그가 숨겨둔 옷감 1백20 필은 몰수하였습니다. 김주에게서 뇌물을 받은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김주를 장안(贓案)에 기록하고 뇌물을 받은 자를 모두 자수하게 하되, 자수하지 않는 자는 장리(贓吏)로 논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장안(贓案)은 뇌물죄를 범한 관리들의 명단이었다. 장리(贓吏)는 뇌물을 받은 관리라는 뜻인데, 이름이 장안(贓案)에 기록되는 것은 본인의 불명예는 물론 자손들도 과거 응시를 할 수가 없게 되고 관직 등용이 제한되어, 가문에 회복하기 어려운 피해를 주는 큰 벌이었다.
임금이 물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니, 조정의 관리들이 얼마나 연루되었기에 그러느냐?”
“김주의 뇌물을 받은 자가 어림잡아도 백 명이 넘습니다.”
“백 명이 넘다니...... 어찌 백 명이 넘는 조정의 신하들이 지방수령이 올리는 뇌물을 받는 몰염치를 범한단 말인가. 이런 참담한 일이......”
할 말을 잃은 임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시한 신하들도 술렁거렸다. 임금은 신하들을 돌아보며 꾸짖듯 물었다.
“의금부의 청에 대해 경들의 의견을 말해 보시오!”
정승과 대신들은 대부분 이 사건에 관여되어 있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못했다.
우승지 임사홍이 나서서 말했다.
"지금 이 일에 관여된 사람이 무려 백여 명이나 된다고 하니, 이들을 다 처벌하면 나라의 평화로운 기운이 상할까 두렵습니다. 이왕 사면령이 내렸으니 법대로 모두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성종은 임사홍의 말에 얼마 전에 원자가 태어난 기쁨을 백성들과 나누기 위해 대사면을 공포(公布)하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조선시대 대사면(大赦免)은 형의 언도를 받은 자는 물론 형의 언도를 받지 않은 자에 대해서도 효력이 발생했다. 또한 형의 집행으로 인하여 상실 또는 정지된 자격도 회복되었다.
"이미 대사면을 내렸으니 탐관오리인 김주도 사면의 대상이고 또한 그에게 뇌물을 받은 사람도 불문에 부쳐야 한다는 말인가?”
대신들이 이번에도 아무도 답하지 못하자, 임사홍이 다시 나서서 아뢰었다.
"뇌물죄를 범한 사람은 비록 사면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장안에 기록한 일이 예전에도 있으니, 김주를 장리로 장안에 기록함이 마땅합니다. 다만 뇌물을 받은 자는 이미 대사면을 내렸으니 죄를 묻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옵니다.”
임금은 사면령을 내렸는데 죄를 다시 묻는 것은 법의 신뢰를 깨트리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김주를 장안에 기록하고 장물을 몰수하라. 하지만 이미 사면령을 내렸으니 뇌물을 받은 사람은 논하지 말게 하라.”
대신들은 한 숨을 내쉬며 안도하였다.
성종은 다수의 신하들이 연루된 것을 알고 실망이 컸다. 임금은 유자광이 지적한 말이 떠올랐다
‘정승과 대신들의 잔치가 호화롭고 사치함이 분수에 넘친 것은 그들이 지방의 관찰사와 수령과 서로 통하여 백성의 고혈을 짜내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표연말과 김흔이 청계천에 놓인 수표교(水標橋)를 건너다 건너편에서 건너오는 동문 선배인 김맹성을 보았다. 김맹성은 금년 봄에 치른 과거에 급제하여 관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김맹성이 대뜸 물었다.
“주상께서 뇌물 받은 죄를 지은 사람도 대사면의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 사실이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맹성이 분을 내며 말했다.
"김주가 자기 물건을 가지고 뇌물을 준 것이 아니오. 이것은 모두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낸 것이니 김주만 아니라 김주에게 뇌물을 받은 조정의 대신들도 장안(贓案)에 기록해야 마땅한 일일 것이오.”
표연말과 김흔도 김맹성의 말에 동조했다. 표연말이 김맹성에게 말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뇌물을 받은 자들은 재물을 탐하는 것이 김주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면을 받아서 장안에 기록을 못한다면, 최소한 누가 받았는지 이름을 밝히고, 받은 물건도 모두 몰수하여 염치가 무엇인지 널리 알려야 합니다.”
김흔도 표연말을 거들었다.
“백성의 재물을 탐하고자 벼슬길에 오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드시 장안에 기록하게 하여, 조정의 관리가 인간적 욕심을 어떻게 다스렸느냐에 따라 청백리 혹은 탐관오리로 역사에 기록된다는 것을 경계하게 해야 합니다.”
김맹성은 두 사람의 맑은 기운을 느끼며 말했다.
“이번 기회에 조정에 악취를 풍기는 훈구대신들을 모두 내치고, 자네들처럼 맑은 기운이 가득한 군자로 채워진 조정이 되었으면 좋겠네. 그래야 백성을 위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대사헌 윤계겸은 경연에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김주가 남에게 준 물건은 거론하지도 몰수하지도 말라고 명하셨는데, 이것은 매우 온당치 않사옵니다.”
윤계겸은 함께 입시한 정승들을 의식해서 뇌물을 받은 자도 죄를 물어야 한다는 강경한 대책보다는 최소한 받은 물건은 몰수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또한 뇌물이라 하지 않고 ‘남에게 준 물건’이라고 표현을 완화하여 말했다.
임금이 대사헌에게 물었다.
"사면령이 내렸는데, 일일이 밝혀 다시 거두어들인다면 법의 신뢰를 잃지 않겠는가?”
"김주가 자신의 소유물을 남에게 준 것이 아닙니다. 백성의 고혈을 짜낸 것입니다. 모두 몰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은 사모가 앞으로 쏠릴 만큼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아끼고 있는 대신들을 향해 물었다.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승들 모두가 대답을 머뭇거리니, 윤사흔이 나서서 아뢰었다.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받은 것들이 많지는 않을 것인데 일일이 확인하여 몰수함은 번거로움이 따를 것입니다.”
성종은 삼정승과 육조판서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면 조정의 신뢰를 잃을 수 있음을 걱정했다.
"받은 자 중에는 재상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상이 김주에게 요구하여 받은 것이 아닌데 이를 밝혀 거두어들인다면, 재상이 오명(汚名)을 얻지 않겠는가.”
윤사흔이 재상들을 대표해서 얼른 말했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사간원의 사간(司諫)이 나서서 아뢰었다.
"재상이 비록 요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김주가 보낸 물건을 받았으면 마땅히 돌려보내야 했습니다. 받고서 돌려보내지 않은 것 자체가 이미 옳지 않은 일입니다. 밝혀서 몰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사헌 윤계겸도 사간을 거들었다.
"김주가 권세 있는 고관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받은 자가 많습니다. 그 이름이 장부에 적히지 않은 자도 많겠지만, 이름이 장부에 적혀 있는 자는 사면령이 내려 비록 죄를 물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받은 물건은 몰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이 정승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대간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경연의 영사(領事) 윤자운이 나서서 모호하게 대답하였다.
"대간의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일이 번거로울까 염려됩니다.”
영사(領事)는 주로 경연(經筵),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 등의 특수 부서에 정 1품이 겸직이나 명예직으로 임명되었고, 경연에는 3인, 춘추감과 관상감 같은 부서는 1인을 두었다.
사헌부 대간이 분연히 임금에게 아뢰었다.
“의금부에서 추국한 문안을 살펴보면, 김주의 뇌물을 받은 자가 위로는 재상에서 아래로는 사대부까지 무려 수백 인이 됩니다.”
대간은 정승들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아뢰었다.
"다른 사람은 족히 논할 것도 없지만, 한명회와 김질과 같이 성상의 은혜가 이미 족하고 부귀 또한 지극한데도 작은 고을에 사는 백성의 고혈마저 짜낸 물건을 받았으니, 대신의 도리가 과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경상도 칠원의 백성들은 괴롭고 무거운 부담을 당하여 원통하고 답답해하는 자가 분명 많을 것입니다. 만약 조정에서 몰수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들의 분한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