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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 익살맞은 대머리

익살맞은 대머리가 최초의 조선 음반사인 오케 레코드사에서 나와야 합니다

by 두류산

익살맞은 대머리


극장에서 윤치호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연락도 없이 공연을 보신 후 분장실로 나를 찾아와 격려해 주셨다. 선생님은 조선어사전 편찬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시어 우리말 보존에 힘쓰고, 이순신 장군 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민족 역사의 영웅을 조선 사람에게 널리 알리는 일도 하고 계셨다. 순회공연으로 만주에 있는 전수린이 경성에 오면 함께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하셨다. 극장을 떠나시면서 내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장한가, 감동이었네!”


장한가를 부르는 공연이 며칠 동안 별문제 없이 끝나자, 윤백단에게 1절부터 부르게 했다. 논개 이야기로 노래를 시작하니 객석에서 더 큰 박수로 화답하는 듯했다. 불안한 가운데 성취감이 들었다.

‘소문만복래 신년 웃음잔치’ 공연은 성공적이어서, 연장공연을 결정했다. 문외 극단의 장래와 장한가에 대한 걱정과 긴장도 풀렸다. 공연의 인기가 소문이 나서 레코드사 사장과 문예부장들이 공연을 보러 들렀다가 인사를 하고 갔다.

새로 레코드사를 차렸다는 이철이라는 사람이 극단에 들려 나를 찾았다.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제안했다.

“익살맞은 대머리가 최초의 조선 음반사인 오케 레코드사에서 나와야 합니다.”

나로서는 이철 사장의 레코드 취입 제안은 관심사항이 아니었다.

“단장님, 내 말 좀 들어봐요. 이제는 레코드가 대세입니다.”

“먹고살기 힘드니 무성영화니 레코드니 하며 옆길로 새는 건데, 생계를 위해 외도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건 달라요. 레코드로 히트를 치면 신불출 선생을 직접 보러 극장으로 오게 될 겁니다. 여배우가 레코드에 취입한 후 그녀가 공연하는 연극을 보러 사람들이 줄을 선다는 이야기가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내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이 사장의 제안은 호소로 바뀌었다.

“지금 조선 백성은 집단 우울증에 빠져있어요. 일본은 승승장구 만주에 이어 중국도 차지할 기세이니, 조선 사람의 마음은 절망적입니다.”

나는 비로소 이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신불출 선생을 잘 알고 있어요. 연극무대에서 일제에 저항하라고 소리치다가 심한 고초를 당한 이야기도 들었고.”

이철 사장은 목소리를 낮추며 열정적으로 말했다.

“조선을 구하는 방법이 총을 들고 독립군이 되는 것만 아니에요. 조선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더 우울증에서 구해내면 그것도 조선을 위하는 일입니다.”

그의 말은 내 생각과 다르지 않았다.

“레코드는 삼천리 방방곡곡에 팔려 나갈 겁니다. ‘익살맞은 대머리’ 만담을 들으면 우울한 마음이 싹 가시고 새로이 힘을 얻을 겁니다.”

이사장은 나의 생각을 안다는 듯,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공연 무대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있으나 레코드는 다릅니다. 공연장이 아니더라도 레코드만 틀면 전국 방방곡곡에서 웃음이 나오고 위로받게 되는 겁니다.”

나는 이사장의 주장에 어느 정도 마음이 움직였다.

‘익살맞은 대머리가 서울을 넘어 전국 어디에서든, 조선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

나는 이사장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축음기 있는 집도 많지 않고, 레코드 가격도 만만치 않은데 그게 가능하겠어요?”

이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을 하였다.

“축음기 한 대면 여러 사람이 듣고 즐길 수가 있어요. 레코드 가격이 보통 한 장에 2원인데, 파격적인 가격으로 보급할 수 있도록 해 보겠어요.”

이사장은 하루만 기다려 주면 정확한 답을 가지고 오겠다고 했다.


이철 사장은 다시 찾아왔다.

“단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오늘 계약합시다.”

나는 처음부터 마음속에 있던 제안을 꺼내었다.

“익살맞은 대머리와 함께 장한가도 레코드로 취입해 주시지요.”

이사장의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장한가는……”

이사장이 말을 이었다.

“장한가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왠지 뭉클했어요. 레코드로 취입하기에 좋은 곡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요?”

“우연히 논개와 계월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어렵습니다. 아니, 가능하지가 않아요.”

나는 실망스러웠지만 이사장의 입장은 이해되었다.

“무대의 관객 앞에서 공연하는 것과 축음기에 얹혀 전국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차원이 달라요.”

이사장은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운이 좋아 사전검열을 통과하여 무대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해도, 레코드는 불가능해요. 전국으로 이 노래가 퍼지면 누군가는 일본 경찰에 알리게 될 겁니다.”

이사장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신불출 선생도, 문외 극단도, 오케 레코드사도 다 끝장입니다. 장한가를 레코드에 넣겠다는 생각은 불나방이 불을 찾아 달려드는 것이나 같아요. 불이 좋기는 하나,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타 죽기 십상입니다.”

이사장의 단호한 말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하지만 장한가가 전국에서 불리어질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한 유혹이었다. 나는 이사장에게 한 번 더 확인했다.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이사장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말했다.

“이길 수 없는 도박입니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하기는 너무 아쉬워, 한 번 더 확인해 보았다.

“이미 사전검열을 통과한 노래요. 무대에서 계속 불리고 있는 노래를 레코드에 취입하는 것이요. 이사장은 모르고 하는 것이고.”

“그래도.....”.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겨있는 이철 사장의 모습을 보고 나는 탄식했다.

‘역시 무리인가’


다음날 이철 사장이 다시 방문하여 말했다.

“도박을 해 보기로 결심했소.”

나는 놀라 이사장에게 되물었다.

“괜찮겠소?”

이사장은 나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와 오케 레코드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장한가’를 레코드에 취입하는 겁니다.”

이사장이 다시 찾아왔을 때, 두려워하면서도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것이 나의 본능임을 느꼈다.

‘불을 찾아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것인가. 불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타 죽을 수 있음에도.’


오케 레코드사는 창립기념으로 레코드 다섯 장을 발매하였다. 다섯 매의 음반 중 세 장이 나의 작품으로 만들어졌다. 만담이 담긴 두 장의 레코드, ‘익살맞은 대머리’와 ‘서울구경’, 그리고 ‘유행 소곡 장한가’가 내가 창작한 것이었다. 장한가는 이미 유행하고 있는 노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유행 소곡’을 곡명 앞에 넣어 발매하였다.

장한가 레코드 뒷면은 <사발가>를 넣었다. <사발가>는 나라 뺏긴 한을 담아내고 있어, 송도고보 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자주 불렀던 노래였다.

‘석탄 백탄 탈 때는 연기가 나는 데, 이 내 가슴은 타는데 연기도 김도 안 나네......’

‘서울구경’은 시골 사람들이 처음으로 경성을 구경하는 내용을 익살스럽게 담으며, 경복궁 앞에 지어진 조선총독부 석조 건물을 풍자한 내용을 넣은 만담이었다.

오케 레코드사는 후발 주자로서 이름을 널리 알리는 데 힘을 기울여 공격적인 판매 전략을 채택하였다. 레코드 가격을 1원으로 낮추는 박리다매 (薄利多賣)로 이윤이 적더라도 많이 파는 것을 시도했다. ‘익살맞은 대머리’는 파격적인 가격인 50전에 판매하였다. 신문에도 광고를 내었다.


'오케 레코드사, 조선 첫 발매 기념으로 음반을 1원이라는 염가로 제공! 요절 복통할 폭소극 신불출의 ‘익살맞은 대머리’는 50전에 제공!'


익살맞은 대머리 레코드가 시장에 나오자마자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레코드 발매 3주 후, 조선일보 2면 하단 광고는 오케 레코드사의 대대적인 성공을 알렸다.


'오케 레코드사가 혜성 같이 조선반도에 출현, 보름 만에 2만 매 판매 돌파!'


레코드를 제작하여 2천 매를 판매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데 약 2주 만에 2만 장을 판매한 것은 대단한 기록이었다. 새로 설립한 오케 레코드사는 음반 첫 발매 이후 바로 굴지의 음반회사 반열에 올랐다. 오케 레코드사에 들렸더니 이철 사장이 보던 신문을 흔들며 나를 반겼다. 매일신보를 펼쳐 보이며 신문기사를 가리켰다. 이 사장은 기사 제목을 크게 읽었다.

“만담의 천재 신불출군, 경향(京鄕)간 대인기!”

기사 내용은 ‘익살맞은 대머리’가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보여주었다.


‘종로거리 한 축음기 상회에서 흘러나오는 <익살맞은 대머리> 타령에 흥이 겨워 어떤 육십 가량 된 노인이 발을 멈추고 정신없이 들었다. 대사 중에 히히거리고 웃는 데가 있자, 그 노인도 소리를 높이고 따라 웃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십여 명이 모여들고, 옆에서 같이 듣고, 서 있던 사람들조차 박장대소하였다.’


나는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스타가 되었다. 특별공연도 개최하였고, 경성 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였다. ‘익살맞은 대머리’의 내용을 알고 있어야 대화에 낄 수가 있다는 말도 돌았다. 내가 출연하는 극장에는 공연 볼 사람을 태운 인력거가 한꺼번에 몰려와서 전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가 되어, 일본 기마경찰이 질서유지를 위해 나서기도 했다.

장한가도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길거리에서 아이들이 장한가를 함께 부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아이들이 논개와 계월향의 이름을 또렷이 부르는 것을 듣고 울컥해져 한동안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장한가 노래가 삼천리강산 구석구석 퍼져나가고, 조선 사람들이 즐거이 부르고 듣는 것이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했다. 총독부가 금지한 만해스님의 논개와 계월향의 항일정신이 노래로 만들어져, 방방곡곡에 있는 조선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리게 된 것이었다.


홍명희 선생은 나를 앞세우고 한용운 스님 댁을 방문했다. 스님께 장한가를 듣게 해 드리려고 축음기와 레코드를 가지고 갔다. 홍명희 선생이 말했다.

“장한가 노래를 들으시면 스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그렇게 조선 사람에게 외치고 싶었던 이름들인데.”

스님의 거처는 사대문 밖 북장 골의 언덕 위에 위치했다. 조선총독부 돌집을 바라보는 게 싫어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는 유명한 스님의 거처였다. 집에 들어서니 만해스님이 반갑게 맞았다. 언젠가는 스님을 직접 뵙고 싶었는데, 마음이 뜨거워졌다. 축음기를 틀어 장한가를 들려드리니, 감격하신 듯 한동안 눈을 감고 계셨다. 이윽고 눈을 번쩍 뜨시더니 나의 손을 잡았다.

“고맙고, 대단하이.”

홍명희 선생이 말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논개와 계월향을 알리게 되었습니다.”

만해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 가득히 미소가 번졌다.

홍명희 선생이 한 숨을 쉬며 말했다.

“하지만 친일부역자들이 논개와 계월향에 대해, 일본 경찰에 아부하듯이 고해바칠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 경찰은 아리랑을 조만간 금지곡으로 할 것이라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만해스님은 손에서 염주를 천천히 돌리며 말했다.

“아리랑을 금지하는 것은 우리 뿌리와 민족정서를 죽이는 것이야.”

스님은 힘주어 말했다.

“아리랑과 장한가를 금지하면, 새로운 아리랑과 장한가를 만들어야 해.”



*****


익살맞은 대머리 레코드가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식민지 조선의 고달픈 사람들에게 만담으로 웃음과 새로운 힘을 줄 수 있으니 뿌듯한 마음이었다. 사람들은 나를 ‘만담의 천재’나 ‘세기의 만담가’라든지, ‘동방의 웃음보’ 혹은 ‘만담왕’이라고 불렀다. 엄청난 성공은 장한가의 레코드 취입이 언젠가는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임을 잊어버릴 정도로, 나를 취하게 했다.

1933년 8월, 총독부는 검열과 감시를 점점 강화하여 문화, 예술인들의 목을 조였다. 신문과 잡지에 대한 검열은 물론이고 레코드, 영화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인 공연장에는 임석 경찰의 수를 늘리어 감시를 강화했다. 만담의 속성상 풍자적이면서 비판을 가미한 공연을 펼치는 나는 늘 일본 경찰에게는 눈의 가시였다. 일본 경찰은 이미 두 달 전에 민족정서를 자극하여 치안을 방해한다는 이유를 들어, 아리랑 노래를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금지하였다.

경성의 8월은 폭염으로 끓고 있었다. 개들이 그늘에서도 혀를 빼물고 헐떡거렸고, 매미소리도 기승을 부렸다. 매미가 신기하게도 왜놈을 욕하면서 울고 있었다. 송도고보 시절 개성의 자남산 자락에서 듣던 그 매미 소리였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귀를 세우고 들어 보았는데 역시 욕하는 소리였다.

“왜놈, 왜놈, 왜놈.......”


무더운 날씨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뒤척이다가 늦게 잠이 들었다. 이른 새벽녘에 곤한 잠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문을 박차고 방으로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다가 사정없이 가슴팍을 발길질당했다. 종로경찰서 고등계 마달영 형사와 일본 순사들이었다. 마달영이 소리쳤다.

“신불출, 기어이 사고를 쳤어!”

일본 순사들이 속옷 차림으로 나를 결박하고 종로 경찰서로 압송했다.


경찰서 취조실에 들어가자마자 형사들은 다짜고짜 몽둥이를 내리쳤다. 나는 정신을 잃었다. 형사들이 양동이에 담긴 물을 내 몸에 끼얹었다.

“장한가, 장한가를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 말해!”

‘이 놈들이 드디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통 중에서도 미리 준비한 대사를 억지로 떠올려 보았다.

“장한가는 기생의 사랑이야기…….”

마달영이 소리를 쳤다.

“어림없는 소리! 논개와 계월향은 왜 집어넣었어? 장한가, 그렇지, 한(恨). 일본에 대한 한(恨)을 강조한 노래야.”

나는 죽을힘을 다해 말했다.

“아닙니다. 기생들끼리 글을 모아 잡지를 낸 것을 보았는데, 잡지 제목이 장한(長恨)...... 그래서…..”

“헛소리하지 마! 논개와 계월향은 임진년 전쟁 때 일본인 장수를 죽인 기생들이야. 3절의 황진이는 위장하려고 끼워 넣은 것이고.”

“아닙니다. ‘장한’ 잡지를 보고…… 진주와 평양 출신 단원들에게 유명한 기생을 물어서, 내 고향 송도의 황진이도 넣고......”

마달영의 주먹이 얼굴에 날아들었다.

“어딜 둘러대! 누굴 바보로 알아!”

나는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문제가 있는 줄 알았으면”

나는 입술을 타고 흐르는 피 맛을 느끼며 겨우 말을 이었다.

“무대에 올리기 전에 검열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레코드 취입은 생각도 못……”

마달영의 주먹이 다시 날라 와서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다.

이때 고등계 미와 계장이 취조실로 들어왔다.

“어이, 너무 심하게 다루지 마. 얼굴 상하겠어. 신불출은 요즘 조선 최고의 유명 인사야.”

마달영은 미와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미와는 취조한 조서를 넘기면서 말했다.

“장한이라는 잡지가 정말 있는지 알아보고, 장한가를 처음 무대에 올린 신불출의 극단......”

마달영이 말했다.

“문외 극단입니다.”

“그 극단을 날려버려! 이 녀석에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뼈아픈 형벌일 거야.”

미와가 마달영에게 말했다.

“이미 사전검열을 받은 노래야. 괘씸해도 어쩔 도리가 없어.”

미와가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우리도 극장에서 장한가를 듣고 박수를 치지 않았나?”

미와는 마달영을 노려보며 말했다.

“한심하고도 한심해! 조센징이…….”

‘조센징’이라는 소리에 마달영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미와가 그런 마달영을 보며 뱉듯이 말했다.

“조센징이 어찌 나만큼이나 조선 역사를 모르는 거야?”


나는 유치장에서 사흘을 지낸 후 풀려나왔다. 풀려나기 전 미와에게 불려 갔다. 미와는 나에게 조선말로 경고를 하였다.

“신불출, 조심해야 할 거야. 너를 노리는 일본 경찰이 아주 많아.”

왜놈 순사가 또박또박 조선말로 겁을 주니 머리가 쭈뼛해졌다.

경기도청 경무부 보안과는 장한가에 대해 사전검열을 잘못하였다고 하여 여러 사람이 문책을 받았다고 했다. 보안과장은 더 이상 검열 업무를 할 필요가 없는 함흥 경찰서장으로 좌천되었다는 소문이었다.

오케 레코드사 이철 사장도 종로경찰서에서 따로 조사를 받았다. 이 사장은 장한가(長恨歌)가 극장에서 인기가 있음을 보고 ‘유행 소곡’이라는 이름을 붙여 레코드에 취입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오히려 경찰에 항의를 하였다. “장한가는 경찰에서 사전검열을 했다고 들었어요. 더구나 무대에서 오랫동안 인기가 있던 유행가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레코드를 전량 폐기하라고 하면 막심한 손해를 누가 책임집니까?”

일본 경찰은 이 사장의 말에, 달래며 경찰서에서 내보냈다고 했다.


이사장은 경찰서에서 나오는 나를 기다렸다. 장한가 작곡을 한 문호월도 경찰서에 붙들려갔었다고 했다. 나도 뭔가 말을 하려고 하니 얼굴이 땅겨 통증을 느꼈다. 이사장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문외 극단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대요.”

내가 가슴을 부여잡고 휘청거리자, 이사장은 급히 나를 부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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