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절도사 이종생과 홍주목사 최호는 관아에서 아전 6명과 포졸 30여 명을 보내어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지역)에 정박한 배에 실려 있는 모든 물건을 빼앗고, 배에 탄 사람들을 잡아다가 여러 날 씩 가두었습니다.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니, 청컨대 일에 관여된 사람들을 모두 잡아서 국문하게 하소서.”
“자세하게 말해 보라.”
“상당군의 노복 도치가 충청도 절도사의 관아를 찾아가서 말하기를, 상당군의 종이었던 김성(金成)이 주인의 위세를 빌어 각 지역에서 물건을 팔고 다니면서 나타나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물건을 싣고 홍주에 와서 배를 대었으니, 물건을 거두어 주기 바란다고 청했습니다. 그러자 충청 절도사 이종생이 그 말을 듣고 홍주 목사에게 연락하여 물건을 빼앗아 한명회의 노복에게 준 사건입니다.”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이 사건을 알게 되었는가?”
“이 사건에 대해 억울하다는 하소연을 의금부에서 접수하였습니다. 홍주 목사는 배에 실은 물건을 모두 몰수하고 배에 탄 사람들도 가두었는데, 무과에 급제한 자도 포함되었습니다. 관련된 자들을 국문하여 제대로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누구라도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라.”
임금은 의금부 지사에게 덧붙여 말했다.
"상당군의 노복은 관찰사에게 소장(訴狀)을 제출해야 마땅한데, 변경을 지키는 장수인 절도사에게 고하였고, 절도사 이종생은 관찰사가 있는데도 스스로 움직였으니, 어째서 그리하였는지 그 까닭도 조사해야 할 것이다.”
임금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배어있었다.
‘또 상당군인가. 그동안의 일만으로도 근신해야 마땅할 것인데......’
의금부 지사가 물러난 지 한 식경도 지나지 않아, 한명회는 어전에 나아와, 자신의 노복이 관련된 일에 대해 임금에게 변명하였다.
"물건의 임자인 김성은 원래 신의 노비인데, 신의 이름을 팔아 이익을 마음대로 불린다 하기에 신이 제재를 가하려고 한 지 오래입니다. 절도사 이종생이 글을 보내 김성이 참으로 집안의 노복이냐고 묻기에, 감사에게 알려 그를 다스리도록 하라고 신이 답하였는데, 그가 사리를 모르고 수령에게 알렸고, 수령도 제대로 분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성종은 한명회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승의 종이 주인의 권세을 믿고 폐단을 만들었고, 절도사 이종생은 자신의 직무가 아닌데도 홍주 목사에게 연락하여 남의 재물을 빼앗아 몰수하였으니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오.”
한명회는 김주의 뇌물사건에 이어 곧바로 터진 사건으로 면목이 없어 절로 목이 움츠려 들었다. 성종은 허둥대는 한명회를 보면서 다소 거칠게 말했다.
“이것이 어찌 정승이 시킨 것이겠는가? 종들이 주인의 권세를 믿고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오. 하지만, 정승은 모름지기 경계하여 아랫사람들이 방자하게 행동하지 않도록 해야 하오."
성종은 물러가는 한명회를 보면서 생각했다
‘절도사와 수령은 국법을 어겨가며 한명회의 뜻을 맞추려고 죄도 없는 사람을 위협하여 재물을 빼앗았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함부로 가두기까지 하였으니, 이런 풍습은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신들을 겁내지 않고 탄핵했다고 임금에게 격려까지 받은 사간원은 이번 사건을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사간 최한정은 간관들과 함께 임금에게 나아와 아뢰었다.
“전하께서 대신들이 잘못을 저질러도 너그러이 용서하시는 까닭은 대신을 존중하는 의리 때문이겠으나, 예전부터 공신이 마지막까지 잘 보전하지 못한 까닭은 스스로의 문제도 있지만, 군주의 잘못이기도 합니다. 근래에 한명회가 공을 믿고 방자하여 죄를 범하는 일이 하나 둘이 아닌데도 전하께서 번번이 용서하시니, 이 때문에 한명회가 날로 더욱 교만하고 방자해집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이시어 공훈이 있고 지위 높은 신하라 하여 용서하지 마소서. 그리하면 조정의 기강이 더욱 바로 서고 엄숙해질 것입니다.”
사간원의 대간이 대사간의 말을 거들었다
"한명회는 훈구대신으로서 권세가 강성하여,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뜻대로 하였습니다. 이번에 또 변경을 지키는 장수와 수령을 동원하여 남의 재물을 빼앗게 하였고, 절도사 이종생과 홍주목사 최호 등은 한명회의 뜻에 아부하여 불법을 감행하였습니다. 이들은 한명회의 권세는 알고 국법이 있는 줄 모르니, 그 죄악으로 말하면 무엇이 이보다 크겠습니까? 신들은 한명회를 국문하여 군주를 속이고 사사로이 이익을 탐한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종은 대간들을 격려하며 말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차라리 군주를 거스를지언정 권세가 높은 신하를 거스르지 않는다고 했는데, 대간들의 기개를 가상하게 여긴다. 도승지는 대간들의 말을 정승들에게 전하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아뢰라고 하라!”
임금의 명을 받고 한명회를 제외한 정승들이 서로 의견을 말했다.
“상당군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인데, 3대째 공이 있는 공신을 어찌 쉽게 벌을 줄 수가 있겠소?”
“이 문제는 상당군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만한 일로 상당군이 벌을 받으면 장차 훈구대신은 모두 무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정승들은 어전에 나아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대신의 잘못이 국가의 체제에 관계된다면 용서할 수 없겠으나, 작은 잘못까지 어찌 죄다 대간의 청대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
성종은 정승들의 말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이번 일은 자질구레한 일이니 죄를 물을 필요도 없다는 말씀이시오? 훈구대신들은 역모와 같은 중죄를 지어야만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오?”
한명회는 대간들이 자신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청을 올리고, 정승들이 이를 의논하여 아뢰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임금에게 나아갔다.
"대간들이 신을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들었습니다. 노신(老臣)이 죽지 않은 죄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과인은 정승이 남의 물건을 빼앗으려 했다고 믿지 않소. 하지만 탐욕스러운 노복을 둔 죄도 작은 것은 아니요.”
한명회는 젊은 임금이 싸늘하게 나무라고 있어 몸 둘 바를 몰랐다. 한명회는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대간들이 신(臣)의 권세가 강성하고 방문객이 많다고 하였으니, 신은 황공하여 견딜 수 없습니다. 신이 군기시(軍器寺) 제조(提調)가 된 지 거의 10년이니, 사직을 허락하여 주소서. ”
제조(提調)는 기술계통의 관직인 병기 제작, 어학, 의학, 천문지리, 음악 등 당상관 이상의 관원이 없는 관아에 대신들이 겸직으로 배속되어 관아를 통솔하던 관직이었다.
임금은 한명회의 말이 뜻밖이었다.
‘원상으로서 병조판서를 겸직하였을 때 당연직으로 맡은 군기시 제조인데, 병조판서를 그만두고도 자리를 아직 놓지 않았단 말인가.’
임금은 짐짓 사직을 말렸다.
"경(卿)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사직하지 마시오.”
"평소에 공무로 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남들이 보고 방문객이 많다고 하나, 군기시에서 일하는 무인이 어찌 손님이겠습니까? 권세가 강성하고 방문객이 많으면 죽어 마땅한 죄가 되니, 성명(聖明)이 아니시면 신이 어찌 목숨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원컨대, 그만두게 하여 주소서.”
성종은 억지스러운 말까지 하며 사직을 청하는 한명회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정승이 목숨을 보전하고자 한다는 말까지 하니, 군기시 제조를 그만두게 하겠소. 이번에 대간들이 도치의 일로 정승의 죄를 엮으려고 하나,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 무엇을 근심하겠소. 다만 탐욕이 심한 종들을 경계해야 할 것이오.”
한명회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임금에게 절하고 물러나왔다.
임금은 승정원에 원자의 탄생으로 사면령을 내렸는데, 절도사 이종생을 처벌하면 법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살피라고 명했다. 도승지 현석규가 의금부의 보고를 올리며 아뢰었다.
“신하로서 세력 있는 자를 쫓아 법을 어기고, 나라가 내려준 권한을 사사로이 행한 것은 내버려 둘 수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은 사면령이 내린 뒤에도 죄를 물어왔습니다.”
"충청 절도사 이종생이 범한 일은 버릇을 길러 줄 수 없으므로 유배형에 처하라. 홍주 목사 최호는 거절하고 따르지 않아야 했겠으나, 수령으로서 절도사의 명을 어기기 힘들었을 것임을 고려하여 관직만 삭탈하라. 상당군의 종 도치는 법에 따라 장 1백 대에 3천 리 밖 변두리 고을의 관노비로 삼는 것이 옳겠다.”
도승지는 임금에게 아뢰었다.
"대사면을 내렸음에도 용서하지 않은 뜻을 각 도(道)에 어서(御書)를 내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임금은 각 도의 관찰사에게 글을 내려 전국의 절도사와 수령들에게 전파하게 하였다.
"신하의 직무는 나라를 위해 힘써 일하는 것이지, 사사로운 의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세력을 좇고 권세에 붙은 죄는 용서할 수 없으므로, 이종생과 최호의 죄를 엄하게 다스렸다. 다만 사면령을 내리고서 용서하지 않으면 신의를 잃는 듯하나, 신하로서 세력 있는 자와 더불어 도당을 만들고 법을 어기고 사사로운 일을 행하는 것은 버릇을 길러 줄 수 없으므로, 사면이 있었으나 용서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