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맹성과 김종직의 제자들은 이종생과 최호 등은 죄 값을 받았는데 한명회는 무사한 것에 분함을 느꼈다.
“한명회가 재물을 탐내어 일으킨 일인데, 죄인의 우두머리인 한명회만 무사하니 말이 되는 일입니까?”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악(惡)을 제거하는 일은 근본을 끊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명회를 놔두고 어찌 악을 제거했다 하겠습니까?”
“한명회의 지위는 신하로서 이보다 더 높을 수 없고, 1품의 관록으로 재산이 이보다 더 넉넉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탐욕을 품고 감히 약탈하는 행위를 하였으니,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한명회가 죄를 지었어도 늘 용서하므로, 그가 마음대로 그른 짓을 하는 것입니다.”
대사간 최한정은 간관들과 함께 임금에게 나아와서, 한명회를 벌할 것을 청하였다.
"신하로서의 죄는 위세를 믿고 권력을 남용하여 행사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한명회는 자기가 공신이라는 지위를 믿고 권세를 써서 뜻대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날로 쌓이고 달로 거듭되다가 일이 드러나서 마침내 감출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너그러이 용서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사간원의 대간이 대사간의 말을 거들었다.
“변방을 지키는 장수의 직무는 적을 막아 나라의 울타리 노릇을 하는 데 있습니다. 한명회는 절도사를 마치 집에 기르는 개처럼 마음대로 부렸습니다. 무슨 죄가 이보다 크겠습니까? 당한 자들이 억울하다고 호소를 하지 않았더라면, 한 배에 실렸던 물건이 죄다 한명회에게 돌아가고, 십 수 명 전하의 백성들이 매를 맞다가 거의 참혹하게 숨졌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훈구대신이라 하여 용서하지 말고, 그 죄를 분명히 다스리어 온 신민(臣民)이 한명회가 위세를 믿고 권력을 행사한 죄를 환히 알게 하소서. 그러면 국가에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사헌부 관리들은 한명회의 탄핵에 사간원보다 뒤처진 것에 자괴감을 느꼈다. 대사헌은 사헌부 관리들과 함께 어전에 나아와, 한명회에게 죄를 물을 것을 청하였다.
"한명회가 죄인의 우두머리인데, 전하께서는 그의 관록과 직위를 유지하게 하시니, 신민(臣民)이 모두 원통해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한명회에게 사사로운 정을 두지 말고 신민(臣民)의 기대와 소망을 이루게 하소서.”
성종은 한명회의 행실이 개탄스러웠다. 하지만 훈구대신의 수장으로 3대째 공신이며 장인이기도 한 그를 쉽게 벌할 수는 없었다. 임금은 노신(老臣) 정인지의 말을 떠올리며 말했다.
"3대째 큰 공이 있는 사람인데, 애매한 잘못으로 죄를 물을 수 있겠는가?”
대간들이 물러가고, 도승지가 서류를 들고 입시하자 임금은 마음에 둔 말을 꺼냈다.
“재상이 어찌 종을 시켜 이런 폐단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가.”
“주인의 세력을 믿고 횡포를 부리는 노복과 반인(伴人, 대신들의 호위 군졸)이 많습니다. 고을 수령들은 권세가의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단속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대신들의 반인과 종이 폐단을 일으키면 수령이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가 이들에게 죄를 물으면 될 것이다. 요즈음 전국 팔도의 어떤 감사도 이들에게 죄를 주었다는 장계가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
현석규는 임금의 마음을 읽었다.
“이번 사건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장차 유사한 일을 막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임금이 길게 한 숨을 쉬자, 현석규가 위로했다.
“이번 사건으로 상당군은 물론 훈구대신, 그리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 고을 수령들에게 잘못을 경계하는 경종을 울렸을 것입니다.”
성종은 현석규의 말에 가슴을 누르고 있던 무거운 기운이 다소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유자광은 김주의 뇌물사건과 한명회가 권세를 믿고 행한 권한 남용 사건을 목격하면서 복잡한 마음이었다. 노여운 마음을 달랠 겸하여, 연로한 어머니를 뵈러 남원에 내려갔다. 어머니가 아들의 두 손을 잡고 반가이 맞았다.
“네가 계란으로 바위를 친다고 하여 어미가 근심으로 마음을 졸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자광이 송구한 마음으로 두 손으로 어머니 손을 쓰다듬었다.
어머니는 그동안 파직을 당한 아들 소식으로 마음고생한 것이 생각나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네가 진정으로 임금을 섬기는 충신임을 내가 안다. 하지만 모난 돌이 정 맞는 법이다. 힘 있는 자들과 맞서다가 화(禍)를 입으면 이것은 효가 아니다.”
“옥에 갇히지도 않았고, 멀리 유배를 떠나 어머니를 못 보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너무 근심 마세요.”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만지며 말했다.
“이제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이다. 내가 죽은 뒤에는 모르겠으나, 네가 옥에 갇히고 먼 곳으로 유배를 간다면 이 늙은 어미는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신신당부하였다.
“무슨 일을 하던 남들보다 앞장서서 나서지 말고, 힘 있는 대신들과 좋게 지내어라.”
성종은 김주의 뇌물사건과 한명회 종인 도치의 사건을 겪으면서 유자광이 한 말이 자주 떠올랐다.
‘성상께서는 백성을 사랑하고 세금을 가볍게 하여 지극히 자애로우신데, 대신들은 감사와 수령으로부터 뇌물을 공공연히 받고 사사로이 서로 청탁하고 있습니다.’
성종은 자신이 즉위한 이후 유자광에게 단 한 번도 품계에 적합한 관직을 주지 않았음을 생각했다.
‘유자광은 실로 특별한 신하다. 재상들의 권세에 아부하지 않고 대간의 비위도 맞추지 않고, 마음속에 품은 바가 있으면 그대로 말하지 않는가. 예로부터 군주는 합당한 인물을 얻어서 그에 걸맞은 관직을 맡겨야 한다고 했다.’
성종은 유자광 같은 인물은 가까이 두고 써야 할 신하라고 생각했다. 임금은 승지에게 명하여 유자광을 궁으로 불렀다. 성종은 유자광의 식견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유자광이 어전에 나아와 예를 올리자, 성종이 물었다.
“지난번 경연에서 고려 말기에 왜적이 깊숙이 들어와 노략질을 하고 심지어 한강과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았소. 혹 왜적이 침범하면 경상도와 전라도, 어느 쪽이 주요 길목이 될 것으로 보시오?”
유자광은 미리 생각해두었다는 듯이 지체하지 않고 답했다.
“왜적이 경유하는 길이 경상, 전라, 충청의 3도(道)에 모두 걸쳐있습니다. 비록 바닷가와 인접한 군현에는 모두 읍성이 있지만, 내지(內地)에는 성(城)이 없거나 퇴락하여 부실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부터 왜적을 대비하여 산성(山城)을 쌓았는데, 이미 세월이 오래되고 낡아서 무너진 데가 많습니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와서 만약 이런 길을 경유하여 틈을 타서 들어오게 되면, 화(禍)의 발생이 측량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종은 몸을 기울여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방비를 해야 하겠소?”
“감사와 절도사로 하여금 산성을 살펴보게 하고, 고을 사람들로 하여금 풍년을 기다려 농한기를 타서 완전히 수축하게 하여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이 사는 지역의 남원 성도 무너진 곳이 많습니다. 다시 성벽을 수리하고 고쳐서 튼튼히 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유자광은 이어서 아뢰었다.
“왜적을 방비함에는 삼포(三浦)의 왜인들 또한 염려해야 할 바입니다. 만약 왜적이 바다를 건너 국경을 침범하면, 이 무리들이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나라에 만약 변란이 있으면, 이 무리들이 틈을 타서 난(亂)을 일으킬까 염려됩니다.”